※ 본 리뷰는 필자가 2009년 7월에 구 블로그에서 작성한 글을 옮긴 것입니다.
동방불패 (東方不敗)
필자는 이미 옛날 블로그에서 인물 리뷰를 통해 동방불패 역을 맡았던 임청하를 극찬한 적이 있다. 임청하라는 배우 자체도 대단하였지만,당시 아시아 영화권에서 메인으로 자리잡고 있던 홍콩 무협 영화의 새 지평을 연 동방불패라는 작품이 너무나도 충격적이고 혁명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홍콩 무협영화의 바이블이 된 명작, <동방불패>를 리뷰해 보고자 한다.
<포스터만큼은 짱깨 냄세가 물신 풍기는 동방불패 국내버전 포스터>
#1. 홍콩무협영화 최고의 걸작 - 동방불패
동방불패는 1992년에 제작된 영화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장군의 아들 3>, <미스터 맘마>, <아래층 여자와 위층 남자>등의 영화가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던 시기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촌스럽기 그지없는 액션과 연출이 매력으로 인정받는 그런 영화들인 것이다. 하지만 동시대 홍콩에서는 홍콩 무협 느와르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서극과 정소동 감독이 투톱을 이루어 무협영화계에 일대 지각변동을 가져올만한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지금 보아도 손색없는 무협 액션과 특수효과, 그리고 주인공들의 뛰어난 연기와 연출, 마지막으로 눈물없이는 볼 수 없다는 애절하면서도 탄탄한 스토리. 그것이 바로 동방불패였다.
원래 동방불패는 김용의 원작 소설 <소오강호>의 일부 내용을 구성한 작품이다. 김용 하면 아시아의 J. R. 톨킨이라 불리우는 무협소설의 아버지. (개그맨 김용이 아니다!) 그 방대한 무협의 세계관을 집대성하여 소설화한 인물인지라 스토리 자체가 엄청 세밀하고 탄탄할 수 밖에 없다. 그 중에서 아주 짤막한 스토리를 좀 더 각색하고 쫄깃쫄깃하게 엮어낸 작품이 동방불패였으니, 영화화한다는 자체부터가 이미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방불패가 소설 소오강호의 짤막한 일부만 다루고 있다보니, 처음부터 동방불패를 보는 관객들은 설정에 있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이는 동방불패뿐만 아니라 김용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여러 영화들이 모두 비슷한 처지이다. 그렇더라도 동방불패는 그나마 다행인 것이, 바로 직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프리퀄격인 <소오강호>라는 영화가 존재하였던 것이다. 1990년에 이미 서극이 정소동 감독과 손잡아 만든 소오강호는 엄청난 인기를 몰고 왔는데, 여기에 삘 받은 나머지 보다 업그레이드된 버전으로 자신들만의 철학과 주제의식을 담아 동방불패를 파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여인이 39살 노처녀라면 믿겄수???>
#2. 동방불패의 프리퀄 이야기 - 소오강호
그렇다면 동방불패를 이해하기에 앞서 먼저 소오강호를 훑어보자.
명나라 만력, 황궁(禁宮)의 장서를 보관하고 있는 내승운고(內承運庫)에 자객이 침입하여, 최고의 무공이 수록된 무공비록 '규화보전(葵花寶典)'이 도난당한다. 이를 맡아오던 동파의 내시 총관은 대립되고 있던 서파에 의해 조정에 알려질까 두려워 심복 황보천호(장학우)를 앞세워, 근래에 사직한 황궁의 금위무사 임진남의 집을 포위하고 그와 대립한다. 이때 관군의 포위망을 뚫고 임진남을 찾은 자가 있으니, 화산파의 수제자 영호충(허관걸)이다. 그는 사매(엽동)와 함께 사부인 악불군의 명을 받고 임진남을 찾아오게 되어 이 사건에 휘말리게 된 것.
한편 총관 내시는 강남 맹주를 자처하는 고수 좌냉선을 고용하여, 규화보전을 찾게 한다. 임진남의 집에 침입한 좌냉선은 그의 가족을 무참히 살해하고, 임진남 마저 목숨을 빼앗는다. 임진남은 죽기전 영호충에게, 자신의 아들 임평지에게 규화보전의 행방을 전해줄 것을 당부한다. 이번 일들을 모두 일월교의 소행으로 몰아넣은 총관은 일월교도들을 탄압한다.
한편, 화산파로 향하던 영호충은 은퇴하여 강호를 떠나려는 순풍당의 당주(우마)와 그의 친구인 일월교의 곡장노(임정영)를 만나 함께 뱃길을 가게 되면서 젊은 시절 두 사람이 함께 은퇴하면 부르겠다는 소오강호를 연주한다. 이때, 좌냉선이 영호충 일행을 추적해 와 일대 싸움이 벌어지고 그에게 큰 부상을 입은 당주와 곡장노는 '소오강호'의 악보와 악기를 영호충에게 전해주고 스스로 배에 불을 지르고 죽음을 택한다.
한편, 임평지를 죽인 황보천호는 자신이 임평지로 위장하여 영호충의 화산파에 접근하게 되고, 마침 제자들을 이끌고 임진남의 집으로 향하던 화산파 사부 악불군과 객전에서 만나게 된다. 이들이 찾는 규화보전은 체내의 기로서 큰 힘을 발휘하는 '인화대법'이라는 무예에 대해 씌어진 비법서였다. 쫓기는 몸이 된 영호충은 무림에서 우연히 강호를 떠도는 풍천양이라는 괴노인에게서 만나 죽음을 초월한 신비한 공격 검술 '독고구검'을 전수받고, 그에게서 영욕에 사로잡힌 사부를 조심하라는 충고를 듣게 된다. 영호충은 이어서 고산족 일월교와 만나 교주의 심복인 남봉황(원걸영)을 알게 된다. 화산파로 돌아온 영호충은 임평지로 가장한 황보천호에게 규화보전의 위치를 알려주나 악불군도 몰래 이를 엿듣는다. 영호충이 황보천호의 독주를 마시고 의식을 잃자 염탐을 하기 위해 잠입했던 남봉황이 그를 일월교로 옮겨간다. 처음엔 영호충이 한인이라 오해했던 미모의 교주 임영영(장민)은 그가 곡장노와 친분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그의 몸에 퍼진 독을 없애 목숨을 구한다. 이때 좌냉선이 공격해 오자 의식이 깨어난 영호충과 결전을 벌이고, 마침내 좌냉선은 남봉황이 구사하는 벌떼에 휩싸여 교주의 무서운 채찍에 목이 잘려 죽는다.
한편, 전부터 규화보전을 노리는 악불군은 황보천호와 동행하고자, 자신의 딸 사매를 그와 결혼시키겠다며 총관이 있는 임진남의 집으로 향한다. 마침내 규화보전을 둘러싸고 총관과 황보천호, 그리고 악불군과의 미묘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그날 밤 황보천호가 숨겨놓은 규화보전을 손에 넣는 순간, 악불군이 이를 낚아채 버리나, 도중에 영호충의 소오강호 악보와 뒤바뀌게 된다. 총관에 의해 수세에 몰린 악불군은 위기를 모면하고자 제자인 영호충과 사제들에게 일월교와 결탁했다며 누명을 쒸우려 하자, 위기에 빠진 영호충에게 교주와 남봉황이 찾아와 총관의 관군과 대립한다. 긴박한 상황, 영호충에게서 몰래 규화보전을 전달받았던 사매가 영호충을 위해 규화보전을 내놓게 되고, 이에 총관과 악불군과의 일대 싸움이 벌어진다. 악불군은 총관이 워낙 고수라 상대가 되지 않아 혼자 도주를 하고, 다시 영호충 일행이 총관과 대적한다. 이때 배신에 대한 두려움에 황보천관이 쏜 총에 총관이 맞자, 이 틈을 타 영호충과 교주가 힘을 합쳐 총관을 처치한다. 하지만 비열한 황보천호는 규화보전을 손에 넣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이어 영호충 앞에 사부 악불군이 다시 나타나 규화보전에 대한 자신의 욕심을 들어내며 사제들을 공격한다. 마침내 제자와 사부 간의 일대 결투가 벌어진다. 사부보다 무예가 낮은 영호충이 수세에 몰리자, 독고구검을 구사하여 사부를 응징하고, 마침내 그를 제압하지만 사매의 간청으로 목숨을 살려준다. 말에 오른 영호충은 사매를 태우고 교주, 남봉황과 함께 화산파를 떠나 새로운 길을 떠난다.
<규화보전을 이용해 절대무림고수와 절대미모를 얻을 수 있다면 필자도 한번...>
스토리가 엄청 복잡하다. 무협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는 분들은 낯설기만 한 용어들이 튀어나와서 벌써부터 대뇌피질이 굳어지는 현상이 발생하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동방불패를 이해하기 위해 위의 내용을 모두 이해할 필요는 없다. 실질적으로 동방불패와 소오강호는 일부 캐릭터들간의 상관관계만 연결고리를 가질 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소오강호의 내용 중 핵심을 찝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규화보전은 절대무림고수가 되기 위한 일종의 비급이다.
2. 영호충은 일월신교의 임영영과 연민의 정을 쌓게 된다.
3. 영호충은 사부 악불군의 악행에 회의를 품고 강호를 떠날 것을 결심한다.
소오강호에 등장하는 악불군, 황보천호, 좌냉선, 임평지, 풍천양 등등의 캐릭터는 사실 동방불패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영호충과 임영영, 그리고 동방불패의 3각 구도가 동방불패의 메인 이벤트이기 때문에 소오강호에서의 복잡했던 설정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다. 어쩌면 이 때문에 소오강호와 동방불패는 각기 다른 작품으로 인정을 받는 느낌이다. 더욱이 주인공의 배역을 맡은 배우들도 달라진다!!
#3. 스토리 - 절세무공을 얻었으나 사랑은 얻지 못한 슬픈 트랜스젠더의 이야기
그렇다면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동방불패의 스토리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화산파의 엘리트 수제자 영호충(이연걸)은 속칭 '오리'로 불리우는 사매 악령산(이가흔)과 함께 유랑을 한다. 영호충은 이미 사부 악불군의 악행에 실망을 하여 니체의 허무주의에 빠진 채 강호를 떠날 것을 결심한 상태. 그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어느덧 연인사이로 발전한 일월신교의 임영영과 만나 회포를 풀기로 약조하였던 것. 하지만 길을 가던 도중 엄청난 내공을 소유한 무리들과 부딪히게 되고, 그 와중에 가면을 쓰고 얼굴을 가린 고수와 슬쩍 눈이 마주치게 된다. 이미 강호를 떠나기로 한 영호충은 무모한 결투는 피하기로 하고 길을 떠난다.
한편 이제 거의 씨가 말라버린 묘족의 부하들을 이끌고 주막에서 불법 거주하면서 영호충을 기다리고 있던 임영영(관지림)은 갑작스레 닥친 일본낭인들의 습격에 의해 위기에 처하지만, 남봉황(원결영)의 활약으로 이를 저지한다. 하지만 더 이상 위험에 노출될 수 없음을 생각한 임영영은 영호충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취를 감추고 만다.
<미모에서는 절대 뒤지지 않는 관지림이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임청하가 너무 쎘다>
일본낭인들이 이토록 판치고 다니는 이유는 단 하나, 일월신교를 새롭게 장악한 뉴페이스 동방불패(임청하)가 일본 낭인들과 손을 잡고 세력을 키우고 있었던 것. 당시 세계 정세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해서 임진왜란을 겪고 있었던 시기로, 명나라는 무리하게 조선을 원조하고 있었던 것. 나라꼴이 이모양인지라 동방불패는 전국시대의 패자로 중국까지 흘러들어 온 일본낭인들과 함께 새로운 묘족의 세상을 만들 것을 야심차게 공약으로 내세운 인물. 이미 선대 교주인 임아행(임세관)을 내치고 그 자리를 뺏은 상태인지라, 임아행의 딸이자 차기 교주감이었던 임영영을 어떻게든 죽여야 했던 동방불패의 처지였다.
영호충은 임영영과 약속한 주막에 도착하지만 이미 주막은 폐허가 된 상태. 시체가 즐비했던 터라 임영영의 행방을 걱정하지만, 그 곳에서 바로 직전에 당도한 화산파의 사제들과 조우하게 된다. 모두들 강호를 떠나기로 결심한 화산파의 제자들. 하지만 이내 관군이 도착하고 이들은 더 이상 무모한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여 도망을 가게 된다. 도망을 가던 영호충은 갑작스레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들을 보고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여 주변을 살펴보게 된다. 그러다가 근처 저수지에서 혼자 자맥질하며 노닐고 있는 아름다운 여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 여성이 동방불패인지도 모르고 미모에 흠뻑 취해 접근한 영호충은 나름 남자랍시고 작업질을 한다.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두 사나이들(?) 인지라 술로서 서로를 교감하게 된다. 원래 남자였던 동방불패는 서서히 여성의 모습으로 변해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영호충에게 끌리게 된다. 동방불패. 규화보전을 익힌 나머지 무공은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지만, 외모는 서서히 여성의 것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규화보전이 남성성을 제거해야지만 터득할 수 있었던 무공이었던 것. 그러다보니 동방불패는 어느덧 마음마저 여성이 되어 저수지에서 우연히 만난 쾌남 영호충에게 살짝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영호충과 사제들은 일본 낭인과 마주치고 결투를 하게 되지만, 서로 강호의 검법을 구사하는 것을 알고 모두 강호인임을 알게 된다. 일본 낭인으로 변장했던 자객은 알고보니 임아행의 오른팔이었던 좌상 상문천(유순)이었던 것. 그렇게 해서 임영영의 행방을 알게 된 영호충은 일본 낭인 무리 속에 숨어있던 임영영과 조우하게 되고, 서로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아버지는 사기꾼, 사랑하는 남자는 여자관계 복잡. 팔자 기구한 악령산>
임영영은 아버지인 임아행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 몰래 일본 낭인의 무리 속으로 잠입해 있었던 상태. 상좌사로부터 동방불패에 대해 정보를 얻은 영호충은 자신이 직접 부딪혀보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동방불패의 자택으로 칩임하는 영호충.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영호충이 동방불패의 얼굴을 몰랐던 것. 그러다보니 자택 안에 있던 동방불패를 보고 예전 저수지에서 본 그 미모의 여성으로 인식하여 급방긋 날려주시는 영호충. 이에 동방불패도 정체를 숨긴 채 영호충과 데이트를 즐긴다. 영호충은 아무 말도 못하는 동방불패를 끌려온 타국의 노예로 오해하고 구해주겠다고 하면서 밖으로 데려나간다. 경공술로 즐기는 한 밤의 플라잉 데이트. 그리고 일본 낭인들의 무리 속에 껴서 술 먹고 노래 부르며 세상 만사 허무함을 읊조린다. 이에 삘받은 동방불패는 한편으로 자신의 야심에 회의를 품으며 영호충을 더욱 연민하게 된다. 하지만 갑자기 나타난 동방불패의 측근 북부천군(이자웅)에 의해 데이트가 깨지고, 둘의 대결을 틈타 동방불패는 영호충의 비공을 찔러 기절시킨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하동굴에 갇힌 영호충. 죄없는 쥐를 혹사시켜 얻어낸 정보가 있었으니, 바로 건너방에 임아행이 있었던 것. 꾀를 내어 탈출에 성공한 영호충은 사지가 묶여 거의 폐인이 된 임아행을 구출하여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말라비틀어져 있었던 임아행은 사실 훼이크. 주특기 흡성대법을 이용해 타인의 정기를 쏙 빼먹은 임아행은 다시 원기를 찾아 영호충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는 임영영에게 당도한다. 동방불패를 처단할 것을 제1 목표로 내세운 임아행은 영호충에게 자신을 도와줄 것을 제안하지만 이미 강호를 떠나기로 한 영호충은 이를 거절한다. 그러던 중 규화보전을 몰래 숨겨놓았던 임아행은 규화보전을 훔쳐보다가 영호충에게 딱 걸려 한 바탕 난리가 나고, 이 사건으로 임아행과 임영영 그리고 영호충은 껄끄러운 사이가 된다.
#4. 단순 무협 액션이 아닌 무협 철학 영화
아아… 스토리를 글로 옮기면서 그 찬란하고 아름다운 무림의 결투 모습을 제대로 묘사할 수 없음에 비탄을 느낀다. 이 부분은 실로 직접 보아야지만 느낄 수 있는 요소. 어쨌거나 스토리를 놓고 보면 전작인 소오강호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임을 느낄 수 있다. 전작이 전형적인 무예 위주의 사건 전개였다면, 동방불패는 무림권법의 결투보다도 동방불패와 영호충의 애절한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오강호랑 분위기가 완전 딴 판이라고 볼 맨 소리를 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바로 서극이 추구하고자 했던 무협 로맨스였던 것이다. 김용의 원작 소설에서도 동방불패와 영호충의 사랑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물론 동방불패가 규화보전 때문에 여성화가 되어 영호충과 연민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토록 아름답고 애절하지는 않다. 되려 소설에서는 동방불패가 완전 괴물딱지로 묘사된다. 그래서 영화보고 삘 받아 원작 소설 보면 중추신경이 테러당하는 기분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동방불패는 양면성을 모두 갖춘 인물이다. 완벽을 추구하지만 완벽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천하를 지배하기 위한 야심에 불타오르고, 무림의 고수가 되기 위해 스스로 남성성을 제거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작 그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한 편으로는 느낀다. 왜냐하면 자신이 영호충을 사랑함에도 완벽한 여성으로서 사랑할 수 없었던 한계가 있던 것처럼, 아무리 무림의 고수로서 천하를 지배한다 할지라도 그 한계가 있었음을 느끼고 있었을 지도. 그렇기에 영호충이 허무를 주제로 시를 읊을 적에 동방불패가 크게 깨달은 듯한 행동을 취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호충 또한 강호에 내놓으라 할 적수가 없을 정도의 무림의 고수이지만 그는 강호에서의 한계를 일찌감치 느끼고 강호를 떠나려 했던 인물. 영호충은 스스로 완벽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그러한 자아의 틀로부터 탈출하고자 했지만, 동방불패는 완벽할 수 없음을 지각했음에도 스스로를 더더욱 완벽해지도록 채찍질하는 틀 안에 가둬두고 있었던 것이 둘의 차이였다. 그리고 영호충을 통해 뒤늦게 깨달음을 얻고 영호충과 함께 사랑의 여행을 떠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자신이 완벽한 여성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또한 불가능했을 터, 어쩌면 흑목야에서 동방불패는 마음 속 한 구석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동방불패의 내면을 더욱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후속편인 <동방불패 2 풍운재기>가 될 터인데, 이에 대해서는 추후 기회가 되면 리뷰를 하도록 하겠다.
<한 밤의 플라잉 데이트를 즐기는 영호충과 동방불패. 역시 사랑은 서로 잘 모를 때 해야 제맛이다>
어쨌든 영호충이 추구했던 강호 탈출은 니체의 니힐리즘처럼 단편적으로는 현세로부터의 이탈을 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영호충이 동방불패와 함께 시를 읊조리는 대목에서 두드러진다.
"천하의 영웅이 되려는 야심을 떨칠 수 없어 강호에 뛰어든지도 어언 십 여년이 흘렸네. 헛되이 품었던 거창한 꿈 문득 돌아보니 일장춘몽이어라."
동방불패가 이 구절에 삘을 받아 자신도 뒤늦게 세상만사가 일장춘몽이 아닐까 하는 회의를 품게 되는 듯 보인다. 어찌보면 작품을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 허무주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강호를 떠나겠다고 결심한 영호충에게 임아행이 던지는 메시지는 그러한 의미를 제대로 받아치는 격이 된다.
"강호? 누구든 원한이 있으면 그게 강호고, 인간이 강호다! 그런데 떠나겠다고?"
이 말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대단히 통렬하고 강력하다. 우리가 욕심을 버리고 이 지긋지긋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겠다고 해서 산 속에 들어가 시나 읊으며 띵까땡가 노는 것이 진정한 탈출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심신이 존재하는 모든 곳이 곧 현실이라는 의미이며, 결국 우리는 현실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니체가 추구한 초인의 삶과 무척 닮아 있다. 니체는 허무주의를 제창하면서 인간이 인간이기를 버려야 한다고 했다. 즉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우리를 포기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심신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지만 현실로부터 탈출하여 참된 자아가 될 수 있다는 것이겠다. 그런데 이 의미를 잘못 받아들여 자살을 하거나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의 사고와 개념 자체를 바꿔야하는 것이 니체의 핵심이었다. 연민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이 육체이든 물질이든 무엇이든 간에. 신 조차도 인간이라는 우매한 존재에 연민을 품었기 때문에 스스로 한계에 다다를 수 밖에 없었음을 니체는 말하였다. 이를 뜻하는 "신은 죽었다"는 그의 말은 대단히 유명하다.
결론적으로, 영호충은 심신의 측면에서 탈출을 꾀하였지만, 임아행은 그마저 부질없는 현실 속에서의 발버둥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보다 숭고한 차원에서 사고할 것을 제시한다. 물론 임아행의 의도는 철학적 성숙을 바랬던 것이 아니라 어차피 현실탈출이 불가능하니 그냥 나랑 손잡고 동방불패랑 싸우자 였지만, 영호충은 결론적으로 정신적 성숙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3대 메인 캐릭터의 공통점이라면 죄다 술고래라는 것>
#5. 동방불패로 대변되는 소수민족의 비애
동방불패가 선대 교주인 임아행을 내치면서까지 일월신교의 교주로 자리잡아 야심을 꿈꾸었던 부분은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소오강호에서 동방불패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딱히 그의 과거에 대해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임아행의 하는 꼬라지가 막무가내형 똥고집 독불장군 방식인 것을 보면 부교주였던 동방불패로서는 불만이 많았을 것은 당연지사.
여기서 일월신교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존재론적 의의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중국은 대대로 한족에 의해 지배되어 온 사회이다 보니 일부 소수민족들은 대대로 오랑캐 또는 노예 취급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 중 묘족이 한족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자신들만의 행동결사집단을 만든 것이 바로 일월신교이다. 그러므로 일월신교는 단순히 종교적인 집단의 의미를 떠나 묘족의 부흥을 위한 생존적 집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임아행은 묘족의 부흥을 꿈꾸기는커녕 규화보전을 통해 사리사욕만 채우려는 자세를 견지하는 듯하다. 이에 동방불패는 묘족의 부흥을 위해 임아행을 내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했을 터이고, 그러기 위해 규화보전을 통해 힘을 얻어야 했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동방불패는 어쩌면 지금 중국사회에서 핍박 받고 있는 소수민족의 강렬한 바램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겠다.
#6. 애절한 러브라인으로 인기몰이
원작에서는 전혀 거론되지도 않는, 오로지 영화에서만 집중적으로 다뤄진 철학적인 논제를 떠나서 영화 자체의 내용에 대해 좀 더 주석을 달자면, 일단 동방불패의 내면과 비정한 스토리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원작과 다소 달라지는 부분이 있는데, 동방불패가 극도의 미인으로 그려졌다는 부분도 있지만, 마지막에 동방불패가 흑목야에서 애절한 모습으로 추락한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원작에서는 동방불패가 결국 확실하게 죽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이 작품에서는 벼랑 끝으로 떨어진 동방불패의 생사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않고 있다. 그러했기에 속편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그만큼 속편은 아예 원작과는 전혀 다른 내용임을 반드시 인지하시고 보시길.
소오강호와 연계되는 포인트 중 주연배우가 바뀌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사실 감독이 동일하고 제작상의 공백도 2년 밖에 안 되는데, 주연이 죄다 바뀌었다는 것은 놀랍지 않은가? 그만큼 감독의 의도 자체가 소오강호와 동방불패를 별개의 작품으로 보고 싶어했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조연 중에는 그대로 동일 배역을 맡은 배우가 있다. 상좌사와 남봉황은 두 편의 작품에서 동일 캐릭터를 소화했던 것. 그만큼 두 배우는 캐릭터와의 싱크로율이 상당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거나 주연 배우가 바뀌었던 것은 동방불패의 입장에서는 큰 호재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래도 소오강호의 영호충을 맡은 허관걸은 코믹 영화 <최가박당> 시리즈를 통해 개그 캐릭터로 입지가 굳어진 인물. 그리고 임영영의 장민도 큰 개성을 보여주지 못했었기에 그대로 장민이 했었다면 동방불패-영호충-임영영 3각 라인에 밸런스가 깨졌을 지도 모른다.
#7. 무협 영화계를 평정한 후덜덜한 캐스팅
이연걸이 다소 키가 작아서 안습이긴 하지만 원채 무술을 잘 하니 서극이 추구하고자 했던 경지 높은 무술 액션을 완벽하게 소화했기에 적절한 배역이라고 보여진다. 얼굴로 치면 조문탁이나 장국영이 더 어울렸을 법한 느낌도 들지만, 이연걸도 부족함 없이 연기를 소화해냈다.
<가느다란 실로 절세무공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만 봐도 초특급 왕구라 액션>
동방불패 역의 임청하는 정말 대박 캐스팅. 솔직히 여장 남자의 역을 맡기려면 중성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당시 이러한 이미지에 적합했던 여자 배우는 많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예전부터 서극과 몇 개의 작품을 해보았던 임청하는 특유의 강렬한 눈빛과 매서운 눈썹, 그리고 야무진 턱선이 어찌보면 남성미를 느끼게 하는데, 그것이 서극에게 제대로 간파되었던 것. 그래서 서극 스스로도 커다란 모험이라고 했을 동방불패의 임청하 캐스팅은 그야말로 대박 중의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 임청하 스스로도 여장 남자 연기는 연극 시절 빼고는 스크린으로는 처음이라고 했었는데, 어쨌든 정말 소스라칠 정도로 완벽하게 연기를 해주었다. 남자로서의 강렬한 카리스마와 여자로서의 매혹적인 자태를 모두 표출해내어 당시 수많은 남정네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것. 그런데 당시 임청하의 나이가 39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남성 팬들이 또 한번 충격을 받았다는 사건은 유명하다.
어쨌든 임청하는 동방불패를 계기로 아시아 최고의 여자 배우로 군림하게 되었고, 이후 <동방불패 2>를 비롯해 <녹정기 2>, <백발마녀전>, <동성서취> 등의 작품에서 주연 배우를 꿰차며 인기를 구가하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동방불패의 여장남자 이미지가 너무 굳건하게 자리잡아 버려서 이후의 작품에서도 모두 비슷한 이미지를 풍긴다는 것. 덕분에 필자는 임청하가 나오는 영화는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봤다는 사실. 필자가 고백하건데, 실은 동방불패로 분한 임청하를 보고 홀딱 반하여 이후 임청하의 동방불패스러운 연기에 모두 심취했었더랬다. 필자의 이상형이 다소 괴상하기는 하지만, 동방불패처럼, 혹은 백발마녀전의 연하상처럼 강인하면서도 내면에는 아픔을 지니고 있는 그런 여성이 너무도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무림 5절급에 버금간다는 풍천양으로부터 전수받은 절세무공 독고구검>
동방불패 이후 두번 다시 동방불패 같은 대작을 만들 수 없다는 서극의 말 처럼, 동방불패는 이미 홍콩 무협영화에 있어서 절대 빠져서는 안될 불문율과도 같은 작품이 되어버렸다. 단지 무협 액션이 화려하다고 해서, 임청하와 관지림이 예쁘다고 해서 관심을 가지고 볼 영화만은 아닌 동방불패. 그 속에는 강호라고 불리우는 우리네 삶 속에서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좋을 지에 대한 나름의 철학적 사고와 행동이 깃들어있는, 완벽을 추구하지만 완벽할 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을 투영하는 초절정 대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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