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필자가 2009년 11월에 구 블로그에서 작성한 글을 옮긴 것입니다.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



<SF 사이버펑크의 일대혁명으로 다가온 공각기동대>



1982년 영화계, 아니 인류에게는 기존의 관념을 철저히 붕괴하고 밝았던 미래에 대한 암울한 청사진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은 사색을 던져주었던 한 편의 명작이 탄생한다. 당시 <에일리언>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외계몬스터의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보여준 영화로 일약 스타에 오른 리들리 스콧 감독이, 또 한번의 자신만의 SF적 철학으로 무장한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만든 것이다. 이 작품은 당시의 시대상을 너무나도 초월한 나머지 흥행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지만, 반 고흐의 그림이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 역시 시대가 지난 지금에서야 비로소 SF철학 영화의 시초이자 걸작으로 추앙받고 있다. 우울하고 어둡기 짝이 없는 미래에,인류는 인류의 기준을 모호하게 만드는 시련에 닥치게 된다. 바로 인간과 똑같이 생긴 휴머노이드 ‘레플리컨트’가 스스로를 생명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가짜 인간을 보게 되고, 그로 인해 과연 생명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인간성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심한 혼돈을 느끼게 되었다. 


기존에도, 그 이후에도 이토록 심오한 주제를 다룬 SF철학 영화는 나오지 못하였다. 많은 영화들이 이러한 주제의식을 심도있게 다루려고 노력하였지만, 이는 모두 B급 패러디에 불과한 허사로 끝나고 말았더랬다. 그런데, 블레이드 러너 이후 13년이 지나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영역에서 블레이드 러너의 정신을 계승하여, 이를 보다 심도있게 발전시킨 희대의 명작이 일본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바로 SF철학 애니메이션의 바이블 <공각기동대>인 것이다. 이 작품 하나만으로 수백장의 논문을 작성할 수 있을 정도인 내용에 대해서 일단 스토리만 짚고 넘어가보자. 


<오로지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탄생한 쿠사나기 모토코 소령>



#1. 불친절하고 난해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 - 쿠사나기의 자아성찰기


때는 2029년. 기업의 네트가 별을 덮고 전자와 빛이 뛰어다녀도 국가나 민족이 사라져 없어질 정도로 정보화되어 있는 근미래. 도시의 야경이 찬란히 흐르는 빌딩 한 곳에서는 일명 공각기동대라고 불리우는 공안 9과 요원들이 모종의 대화를 감시하고 있다. ‘프로젝트 2501’이라는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프로그래머의 정치적 망명을 조율하고 있던 회담장에서, 공안 6과의 꺼림칙한 행동이 의심스러웠던 공안 9과는 마침내 프로그래머를 빼돌리려던 가벨 공화국의 대사를 처리하기로 나선다. 빌딩 옥상에서 자유낙하하여 기습적으로 대사를 사살한 공안 9과 소속의 쿠사나기 모토코 소령은 광학미체를 써서 경찰들의 시선에서 사라지며 모습을 감춘다. 


한편, 이 시기엔 얼마 전부터 정체 불명의 해커가 주로 EC권에 출몰하여 네트에 개입, 주가 조작, 정보 수집, 정치 공작, 테러, 전뇌 윤리 침해 등 각종 범죄를 일으켰다. 그는 불특정 다수의 인간을 고스트 해킹해서 마음대로 조종하였기 때문에, 일명 ‘인형사’로 불리었다. 인형사를 쫓던 공안 9과는 익명의 청소부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자 그를 검거하려고 나선다. 하지만 그 청소부는 단지 자기의 마누라가 바람이 나서 그 증거를 포착하기 위해 공중전화기를 이용해 해킹을 하고 있었던 것. 공안 9과가 쫓는다는 것을 알게 된 청소부는 냅다 도망가고, 그 와중에 자신에게 정보를 준 어느 콧수염 사나이에게도 도망가라고 외친다. 콧수염 사나이는 갑자기 공안 9과의 수사차량에 총격을 가하고 광학미체를 써서 도주, 이를 쿠사나기가 쫓는다. 그리고 길고 긴 추격 끝에 입식타격 룰로 싸워 상대를 쓰러뜨리는 쿠사나기. 그녀는 범인을 향해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불쌍한 존재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아무튼 범인 체포 후 조사에서 누군가의 도움으로 해킹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청소부는, 공안 9과의 조사 결과 그의 모든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인형사가 청소부의 전뇌를 고스트 해킹해서 조종했던 것. 고스트는 무엇인가, 자신의 존재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해 늘 고민하는 쿠사나기는, 휴가를 틈타 자신의 취미인 스쿠버다이빙을 즐긴다. 공안 9과의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인 바트는 그런 쿠사나기에게 잘못하다가는 바다 밑으로 가라앉을 수도 있다고 충고하지만, 수면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순간 새로운 세상과 자신을 보는 느낌이라는 쿠사나기의 말에 멍때리는 표정을 선사한다. 그리고 그 순간 저 멀리 빌딩 숲 사이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에 흠칫 놀라는 쿠사나기. 홀로 자신의 머리 속에서 외쳐진 그 소리에 대해 쿠사나기는 고스트의 속삭임이 아닐까 하고 고뇌한다. 


<광학미체를 써서 유유히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



한편, 비가 오는 날 밤 길거리에서 어느 나체의 여인이 차량에 치이는 사고가 발생한다. 다행히 피해자는 인간이 아닌 의체. 하지만 쿠사나기 소령과 똑 같은 의체를 생산하는 메가틱 바디사의 의체가 제멋대로 움직여서 사고를 냈다는 것이 밝혀지자 이 또한 인형사의 짓이라고 판단한 공안 9과는 부서진 의체를 수거하여 실험실로 가져온다. 조사 결과 비록 전뇌에 저장된 내용은 없지만, 특정부위에서 펄스가 감지되어 이상한 현상을 보이게 되고, 쿠사나기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고스트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2. 원작과는 다른 짭짤함


필자가 스토리를 핵심적인 사건 위주로 나열은 했지만, 아마 이 작품을 한 번도 보지 않은 독자라면 스토리만으로 전체적인 내용이 잘 이해가 안 갈수 있겠다. 하긴 작품을 직접 봐도 이해가 잘 안가는 내용뿐이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이 작품은 아예 처음부터 친절한 해설은 결코 해주지 않는 매우 불친절한 작품이다. 이는 사실 방대한 분량에 달하는 원작의 내용을 2시간짜리 애니메이션에 집어넣어야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 다른 이유로는 일본 만화 특유의 애매모호한 상황 전개를 통해 계속해서 고뇌하게 만드는 묘한 연출 기법이기도 하다. 즉, 앞 뒤 설명 탁탁 잘라놓고 핵심 내용만 던져주어서, 앞과 뒤의 내용은 알아서 추측하라는 얘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은 더욱 매력적이다. 한 10번은 봐야 그나마 전체적인 상황들이 연결이 되는 이해의 단계에 다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이러한 불친절함에 넌더리를 지을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오히려 이런 작품을 선호한다. 한두 번 보고 질려버리는 영화보다는, 여러 번 보면 볼수록 그 내면에 담긴 숨은 의미를 찾아내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 더 좋다. 바로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들의 작품 속에 숨겨놓은 여러 비밀들을 알아내는 재미랄까?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이 명작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일지도.


<이 작품의 원작만화. 이미지는 해외판본이다. 쭉쭉빵빵의 쿠나사기가 눈에 띈다>



일단 원작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 작품은 시로 마사무네의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는 원래 일본 만화답게 쭉쭉 빵빵 미소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메카닉 만화를 즐겨 그리는 SF 만화가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은 남들과 사뭇 달랐는데, 그것은 바로 작품 속에 치밀하게 구성된 설정과 SF 철학적 주제 의식을 담았다는 것. 깊이 뿐만 아니라 설정과 구성에 있어서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했기 때문에 그는 오시이 마모루라는 어느 한 괴짜 천재 감독의 눈에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게 된다. 그 작품이 바로 공각기동대였다. 


본 애니메이션은 원작의 스토리 중 일부를 채택하고 있다.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오시이 본인이 생각하기에 자신의 주제 의식을 가장 잘 투영할 수 있는 내용들을 모아서 마치 다른 에피소드를 만든 것처럼 보인다. 원작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생각만큼 무겁지는 않고 때로는 재미있는 유머코드도 섞여있지만,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면서 이러한 부스러기는 전부 털어내고 철저하게 심각한 작품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러한 차이는 공각기동대의 TV애니메이션 버전인 <공각기동대 S.A.C(Stand Alone Complex)>와 비교할 때 쉽게 드러난다. 이에 대해서는 다시 얘기하도록 하겠다. 어쨌든 원작을 더욱 심화시켜 결국 역사상 최고의 SF 걸작 애니메이션으로 탄생시킨 오시이 마모루, 그 인간은 대체 누구인가? 쉽게 말하자면 애니메이션을 극강의 리얼리티로 이끈 선구자라고 할 수 있겠다.


<쿠사나기의 탄생 과정. 저 디테일을 보라. 오시이 마모루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3. 오시이 마모루의 똘끼정신과 장인정신


오시이 마모루는 일단 자신이 철저하게 작가주의적 정신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실험적인 작품도 많이 만들고,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철학적 코드를 많이 시도하기도 한다. 게다가 여러가지 상징을 심어 넣어서 보이는 것 외적인 무언가 다른 내용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가 이러한 끼를 최초로 본격화한 것은 바로 1985년작 <천사의 알>이다. 도무지 설명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세계관과 캐릭터.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한 몽환적인 세상을 보여준 그는, 당시 애니메이션으로는 실현하기 어려울 것 같았던 비주얼을 실현하며 일약 다크호스로 떠오른다. 그러다가 기어이 일을 터뜨리게 되는데,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 준 희대의 명작, 바로 <기동경찰 패트레이버>가 그것이다. 살짝 상업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그는 이 작품을 통해 또 한번 리얼리즘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놀라운 시도를 하게 되는데, 바로 광각렌즈적 프레임을 도입하여 영화와 같은 질감을 구현했던 것. 여러 편의 극장판과 TV판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오시이 마모루를 최고의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한다. 


그런데, 오시이 마모루는 괴짜 감독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대학 때부터 여러 편의 단편영화를 제작한 경험도 있어서, 실제로 그는 애니메이션 말고도 여러 편의 실사영화를 제작한다. 사실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를 모두 연출할 수 있는 감독은 드물기 때문에, 그의 입지에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장르를 교묘히 짬뽕하는 시도도 해 볼만 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에서 성공적으로 적용되었는데, 문제는 실사 영화에서는 한계가 있었던 것. 그 대표적 예가 2001년작 <아발론>인데, 비록 주제의식은 좋았다고 하나 흥행에서나 평가에서는 졸작에 미치고 말았다. 애초부터 만화다운 발상 자체가 잘 안 먹혔던 것. 게다가 공교롭게도, 역사적으로 일본 영화계에 있어 만화를 모티브로 한 실사 영화는 죄다 죽을 썼다는 것이다. 이 역사의 불문율에 오시이 마모루도 피해가지는 못하였던 듯싶다. 어쨌든 오시이 마모루는 여러 비판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기만의 작가주의 정신을 고집하여 일본 애니메이션계 최고의 하이퍼 리얼리즘 작가라는 명성을 얻고 있다.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미래의 모습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가와이 겐지의 음악. 어딘가 모르게 블레이드 러너와 많이 닮아 있다. 영상도 음악도>



#4. 귀신 씨나락 까먹는 듯한 사운드의 대가 가와이 겐지


어쩌다보니 스탭에 대한 소개부터 되었는데, 기왕 하는 김에 한 명 더 하자. 바로 오시이 마모루만큼 엄청난 사나이가 스탶에 속해 있는데, 음악을 맡은 가와이 겐지가 장본인이다. 일단 이 작품의 오프닝에서 흘러나오는 귀신이 봉창뚜들기는 듯한 노래를 들어보라. 정말 소름끼치지 않나? 어떻게 이런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그런데 듣다 보면 의외로 매력이 느껴진다. 어딘가 거북하지만 그렇다고 두려운 음악은 아닌 것 같다. 이번에는 중반부에 쿠사나기가 도시의 암울한 거리를 배경으로 배회할 때 나오는 음악을 들어보라. 참으로 신묘하다. 무언가 마음 속에서 내 고스트가 술렁이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가와이 겐지는 심리음악의 대가이다. 일명 ‘사운드의 심리학자’라고 불리기까지 한다. 일찍이 OST에서 시도하지 못했던 어딘가 거북하면서도 몽환적이고 웅장하면서 매력적인 음악, 피부가 아니라, 오로지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는 그런 음악을 만드는 장인이다. 


그는 일찍이 오시이 마모루라는 거장과 함께 입지를 굳혔다. 오시이 마모루가 <기동경찰 패트레이버>로 자리매김했듯이, 그도 이 작품을 통해 천재적 음악감독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는 오시이 마모루가 추구하는 몽환적이고 철학적인 주제 의식이 그의 음악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가와이 겐지는 오시이 마모루와 많은 작품을 같이 하게 된다. <아바론>은 물론이며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의 속편인 <이노센스>의 음악도 그가 담당했다. 필자가 리뷰했던 <엽문>에서도 가와이 겐지가 음악을 맡아 장중한 음악을 선보였다는 것을 강조했던 적이 있다. 게다가 가와이 겐지는 우리나라 영화인 <남극일기>에서도 음악을 맡아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참고로 가와이 겐지는 <링> 시리즈에서도 음악을 맡아 특유의 소름끼치는 음악을 맘껏 선보이기도 하였다.


<미래에는 이렇게 자신의 뇌를 슬쩍 꺼내서 요리조리 백업도 하고 카피도 할 수 있다는 충격적 설정>



#5.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몸풀기


휴우…이제는 작품으로 돌아와서 얘기해 보자. 아주 먼 산을 돌아온 듯 한 느낌인데, 문제는 이제부터이다. 이 작품에 대한 고찰은 그야말로 수백페이지의 논문으로도 부족한 엄청난 내용의 것이 될 테니. 하지만, 필자는 전문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학에 대해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다. 따라서 필자는 이 작품을 통해 개인적으로 느낀 것만을 얘기하고, 나머지 철학적인 요소는 철저하게 다른 이의 글에서 일부 발췌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작품은 누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철저하게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먼저, 이 작품을 10번 정도 봐야 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 몇 가지 용어나 컨셉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자 한다. 일단 배경이 되는 2029년은 우리가 현재 보편화하고 있는 네트워크가 고도로 발달된 사회이다. 그래서 지금은 PC나 단말기가 있어야 소통되는 네트워크를 2029년에는 직접 몸에 연결해서 의사소통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기기가 바로 ‘전뇌’(전자 뇌). 감히 인간의 뇌를 어찌 기계로 대체할 수 있을까 싶지만, 어쨌든 설정상 그렇다. 뇌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신체까지 전부 기계로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의체’라는 것이 존재한다. 


전뇌와 의체의 존재로 인하여 인간의 의식은 데이터화되어 네트워크를 통해 전송이 가능하다. 서로 랜 선만 꽂으면 PC끼리 원격제어가 가능한 것처럼, 내가 다른 의체로 들어가서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전뇌로 자신의 의식을 이동시키는 것을 ‘다이빙’이라고 한다. 마치 물 속에 다이빙하는 것과 같이 남의 의식 속에 내가 다이빙한다는 의미이다. 의체화나 전뇌화는 의무 사항은 아닌 듯싶다. 역시 생활의 편리함을 추구하다 보니 그러한 경지에까지 도달한 과학기술 이지만, 쿠사나기가 말하듯이, 고도의 전문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메카닉의 정비를 받지 않고는 오히려 죽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즉, 특수화의 끝에 있는 것은 느슨한 죽음뿐이라는 것이다. 의체화를 하지 않고 전뇌화만 한 인물로 토그사가 등장한다. 토그사는 자신의 그러한 이력이 공안 9과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쿠사나기는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토그사를 뽑았다고 한다. 이 의미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따로 다루겠다.


<쿠사나기의 듬직한 친구 바트 소령. 뇌의 일부만 빼고 전부 의체화된 터미네이터이다>



쿠사나기와 바트는 전부 의체화되어 있기 때문에 몸이 손상되어도 금새 다른 의체로 갈아타면 된다. 단, 전뇌는 한번 손실되면 복구가 불가능하다. 백업을 받아놓았으면 모르겠지만. 그래서 일단 전뇌만 안전하면 충분히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기계를 통해 불사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미래의 도시를 관장한는 공안에는 여러 과가 존재하는데, 각각의 임무에 따라 구분이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9과는 수상 직속의 특수 실행 부대로, 전뇌 네트나 공안 관계의 테러 대책 등의 공적으로는 불가능한 사건의 감사나 해결을 임무로 한다. 특히 이들은 네트워크 윤리나 범죄를 다루기 때문에 ‘공각기동대’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공안 9과의 요원들은 대부분 최첨단 의체와 해킹 능력을 가지고 있다. 


전뇌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면, 애초부터 인간이었던 사람의 의식을 전뇌로 옮긴 것과, 아예 처음부터 기계로 만들어진 전뇌가 있다. 이 중 전자는 어떤 메커니즘이던 간에, 사람의 의식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흔히 영혼으로도 부를 수 있는 ‘고스트’가 존재한다. 이 고스트라는 것은 사실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애매하지만, 흔히 자아라는 것을 지각하게 해주고, 생명체로서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내면의 의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기계로 태어난 전뇌는 이러한 의식이 스며들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인공적인 지능이 삽입되기 때문에 고스트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 쿠사나기가 처음부터 작렬해주시는 ‘광학미체’는 가장 고도화된 의체만의 특수 능력이다. 광학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게 표피를 바꾸어주는 기능인데, 너무 적용하기 어렵고 가격도 비싸다 보니 공안에서도 일부 과(9과와 2과만 적용한 것으로 알려짐)만 적용하고 있다.


<왼쪽의 청소부는 자신이 고스트 해킹을 당했는지도 모르고 삶을 살아간다. 생각해보면 정말고 무섭고 끔찍한 미래의 우리의 자화상이 아닌가>



모든 사건의 전범인 ‘프로젝트 2501’은 스토리에서도 살짝 설명했지만, 애초에 프로그램으로 태어났다. 맨 처음 등장하는 망명을 요하는 프로그래머가 바로 이 프로그램의 제작자이다. 프로그램이 지멋대로 날뛰다보니 공안 6과에서 사건을 쉬쉬하기 위해 프로그래머를 해외로 빼돌리려고 했던 것. 어쨌거나 이 프로그램은 비록 유형화된 실체는 없지만,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의식을 어디로든 뻗쳐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 전뇌없는 의식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는 이따가 다시 다루겠다. 이보다도 더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정의된 용어나 컨셉들이 많지만, 일단 여기까지만 다루기로 하겠다. 이 정도만 알아도 작품을 보는데 지장은 없으며,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는 속편 <이노센스>에서도 어느 정도 단서로서 작용은 하게 될 것이다. 



#6. 본격 작품 해부 - 생명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색


이제는 본격적으로 철학적인 주제로 들어가보자. 무엇부터 다뤄야 할까… 이 작품에는 너무나도 많은 암시와 상징이 깔려있어서 하나하나 거론하다가는 끝을 못 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단은 이 작품의 메인 사상인 ‘생명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언급하겠다. 


이 작품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등장하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생명체의 형태는 아니다. 그들은 모두 부분적으로 혹은 전부 기계화되어 있다. 완전한 휴머노이드의 형태를 제외하고 바트와 같이 몸 전체와 뇌의 일부분이 전뇌화되어 있더라도 일단 그들은 생명체로 보인다. 단, 쿠사나기는 다르다. 오프닝 장면에서도 보이듯이 쿠사나기는 마치 처음부터 완벽하게 제조된 휴머노이드로 여겨진다. 그래서 과거의 기억이 없는 자아에 대해 늘 끊임없이 고뇌한다. 자신은 진정 생명체로서 존재하고 있는가 하고. 그럼 우리는 무엇을 생명체라고 해야 하는가? 단지 의식만 있으면 생명체인가? 살아숨쉬는 심장이 기계로 대체되고, 뇌는 차가운 금속에 의해 단단하게 바뀌어버려 수많은 전기적 신호들이 오고가게 되어버린 무거운 금속덩어리가 과연 생명체인가? 반대로 의식은 없지만 숨은 쉬고 있는 코마상태의 환자도 우리는 생명체라고 한다. 이는 뇌만 남아있고 의식도 없는 기계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공안 6과 국장과 프로젝트 2501의 공성방벽 개발자인 닥터 윌리스>



일찍이 생명체의 정의에 대해서 <블레이드 러너>는 촌철살인적인 메시지를 제시해 주었다. 레플리컨트로 불리우는 휴머노이드들이 사람들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고 자아를 의식하지만, 단지 제조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한된 생명을 부여받고 짧은 삶을 살아간다. 비록 그들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끝내 그들은 자신들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형사 데커드에게 의미론적인 흔적만을 선사한다. 단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은 생명체가 아닌 단순한 피조물이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상은 유지되는 듯싶다. 외형적으로나 내면적으로 똑 같은 기계의 몸뚱아리를 가지고 있지만, 태생부터가 자연체에서 기계화된 인간과, 애초부터 기계로 만들어진 휴머노이드 사이에는 자연적인 탄생과 인위적인 탄생이라는 차이점에서 생명체의 기준이 명확하다. 자연적인 탄생에는 정해진 규칙도, 예측도 불가능하기에 다양성이 존재하지만, 휴머노이드는 정해진 대로 만들어져서 정해진 대로 기억이 주입되기 때문이다. 즉, 똑 같은 모습과 똑 같은 기억과 똑 같은 의식을 가지고 존재하는 휴머노이드들이 마치 카피된 것처럼 세상에 널려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중반부에 가와이 겐지의 음악과 함께 우울한 도시 속을 스치며 지나가는 쿠사나기의 눈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쇼윈도 안의 마네킹이 비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을 시사하는 것일지도. 


그런데, 생명이라는 기준에 적용하기 힘든 예외적인 사태가 발생한다. 바로 아주 우연히 자아를 갖게 된 ‘프로젝트 2501’의 탄생. 그는(그라고 하기도 어렵지만) 비록 태초에 인간이 만든 규칙에 의해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프로그램으로 제작된다. 하지만 다양한 네트의 세상을 휘저으며 다니다가 우연히도 버그가 발생하여 스스로를 자각하게 되고, 이에 예상치도 못한 행동을 통해 스스로를 생명체로서 인정받기 위해 자신을 드러낸다. 인형사는 공안 9과에 잡혀왔을 때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의체에 들어간 것은 6과의 공성방벽을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만,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은 나의 의사이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정치적 망명을 요구한다."


당연히 식겁하는 기존의 생명체들은 인형사를 단순한 자기복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인형사는 보기좋게 기존의 생명체에 대한 정의를 흐트려 놓는다. 


"그렇게 말한다면 당신들의 DNA 역시 자기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이란 것은 정보의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결절점과 같은 것이다. 종으로서의 생명은 유전자란 기억 시스템을 가지고 사람은 단지 기억에 의해 개인일 수 있다. 설령 기억이 환상의 동의어였다고 해도 사람은 기억에 의해 사는 법이다. 컴퓨터의 보급이 기억의 외부화를 가능하게 했을 때 당신들은 그 의미를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생명체라는 증거가 없다는 말에 인형사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의 과학은 생명을 정의할 수 없으니까… 나는 정보의 바다에서 발생한 생명체다."


<쿠사나기는 자신의 육체를 파괴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버릴 수 있게 된다. 이는 변이를 위한 필요 과정이다>



인형사의 정의에 따르면 인간은 DNA라는 유전자 코드를 통해 자신의 기억을 후세에 남기고, 그 기억을 물려받은 후세는 결국 또 하나의 인간으로서 생명체로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개의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그 또한 자신의 기억을 어떠한 방법으로든 남길 수 있다면 그것도 생명체로서의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한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자기복제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일까? 이에 인형사와 쿠사나기가 마지막 장면에서 나누는 대화를 보자. 


"(인형사) 어떤 것을 이해하고 나서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자신을 생명체라고 말하였지만, 현 상태로는 아직 불완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 시스템에는 자손을 남기고 죽음을 얻는다는 생명으로서의 기본과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쿠사나기) 복사를 남길 수 있잖아."


"(인형사) 복사는 복사에 지나지 않는다. 겨우 한 종류의 펄스에 의해 전멸할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고 무엇보다도 복사로는 개성이나 다양성이 생기지 않는다. 보다 존재하기 위해서, 복잡 다양화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버린다. 세포가 대사를 반복하고 다시 태어나면서 노화하고 죽을 때까지 대량의 경험 정보를 지 우고 유전자와 모방자만을 남기는 것도 파국에 대한 방어기능이다."


"(쿠사나기) 그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도 다양성이나 흔들림을 가지고 싶은 것이군요. 하지만 어떻게...." 


즉, 생명체란 하나의 기억에 의해 존재하지만 그 기억이 다음 세대에 100% 똑같이 전이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버려지고 일부는 다른 개체의 기억과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형태로 전이되는 것을 말한다. 한 마디로 기억과 기억이 융합하는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한 다양성의 창조가 발생됨으로써 비로소 생명체라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본 것이다. 현재의 우리는 정자와 난자의 배합에서 발생하는 부모의 유전자간의 변이로 인해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 하지만 육체를 기계로 대체한 미래에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란 결국 새로운 형태의 유전자의 변이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 유전자가 반드시 DNA라는 단백질 덩어리일 필요는 없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기계의 몸을 가지게 된 인간은 더 이상 체내에 DNA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그들은 그나마 인간 본연으로서 가지고 있던 증거물, 바로 의식을 융합하여 새로운 변이를 꾀한다. 오로지 정신체로서만 존재하던 인형사에게 유일한 기억의 도구는 바로 그 스스로의 의식이었고, 쿠사나기 역시 스스로 고뇌하게 만드는 의식만이 유일한 생명체로서의 증거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형사는 왜 하필 융합의 대상으로 쿠사나기를 선택하였을까? 재미있게도 인형사는 쿠사나기를 직접 만나기 위해 공안 9과에 오고, 아예 대놓고 "융합하고 싶다”는 말로 프로포즈를 한다. 이를 암시하는 대사가 공안 9과의 멤버들 사이에서 오고 간다. 


"인형사 녀석 왜 9과로 들어갔지?" 


"어쩌면 짝사랑의 상대라도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군…"


사랑이 반드시 육체적인 교감만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정신적인 사랑의 개념을 알고 있었다. 흔히 플라토닉 러브라고 불리어지는 순수한 정신적 사랑을 말이다.


<수면으로 떠오르면서 또다른 자신과 하나가 되는 이 장면은 많은 것을 암시한다>


 

인간은 후세를 남기기 위해 상대를 찾아야 하는데, 그 동기가 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래서 어쩌면 사랑은 인류가 수 세대를 거쳐 존재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필연적인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자면 인형사의 쿠사나기에 대한 집착은 바로 플라토닉 사랑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흔적을 다음 세대에 남기고 싶어한 것인지도. 


이는 지극히 우리와 너무도 닮아있다. 인형사의 행위는 그 자체로 이미 생명체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쿠사나기는 이 사랑을 기꺼이 받아준다. 그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사랑에 대한 대가를 알고 있었다. 사랑은 늘 두려움과 불안을 가져오지만 희망과 기쁨도 가져온다. 이는 내가 다른 세상으로 또 다른 존재로 각성하게 될 때도 마찬가지로 느낀다. 우리는 비록 기억하지 못하지만, 분명 우리는 태아일 때 어머니의 뱃속에서 이러한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희망과 기쁨을 예상할 것이다. 


쿠사나기는 비록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이러한 느낌을 아주 자주 느끼곤 한다. 바로 휴가 시간에 즐기는 다이빙. 그녀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트에게 이런 말을 한다. 


"두려움, 불안, 고독, 어두움… 그리고 어쩌면 희망? 해면으로 떠 올라갈 때 지금과는 다른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그런 느낌…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어."


쿠사나기는 최후의 순간에 인형사와의 융합을 앞두고 두려움과 불안 등을 느끼지만, 어쩌면 정말 자신 앞에 펼쳐질지도 모르는 희망에 모든 것을 건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다이빙하고 나서 정말 다른 자신을 만나게 된다. 여기에서 바다가 상징하는 것은 실로 엄청난 것이다. 이미 인형사는 자신을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체’라고 소개하였고, 쿠사나기는 실제로 바다에서 다이빙을 하면서 자신이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녀는 실제로 다이빙을 통해 인형사와 융합함으로써 새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태초의 생명체는 바로 바다에서 탄생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바다는 이 작품에서 생명체로서 탄생하는 가장 기본적인 매개체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인형사의 탄생에 대해 얘기해 보자. 인형사는 자신이 우연히 정보의 바다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우연히'라는 표현이 상당히 중요한데, 인간을 비롯해 모든 종은 바로 기억이라는 유전자를 후세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우연한' 버그에 의해 새롭게 진화하게 된다. 아니, 태초에 아무런 생명체도 없던 바다 속에서 그야말로 우연히 생명체가 탄생한 것이기도 하다. 그만큼 ‘우연히’라는 표현은 그 대가로 다양성을 제공하고 있다는 의미이며, 이는 바로 생명체가 가지는 기본적인 조건임을 뜻한다.


<필자는 이런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심도있게 고민하는 것을 좋아한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먹는다>



자, 이제 쿠사나기는 그 ‘우연한’ 계기를 통해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는 계단 앞에 섰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탱크와의 격전에서 탱크가 쏜 발칸이 진화계통도가 그려진 벽을 타고 박히며, 종의 최상위 단계에서 멈추는 장면이다. 현재 인류를 대표하는 종까지 그려진 그 진화계통도 상위에 새롭게 오를 수 있는 종, 그것이 바로 쿠사나기인 것이다. 그 결과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쿠사나기는 그 암시를 통해 인형사와의 융합으로 새로운 종으로서의 탄생을 기도한다.


<블레이드 러너>가 이러한 고뇌에 찬 존재들이 그 새로운 도약의 계단 앞에서 처참히 무너졌던 반면, <공각기동대>는 아주 친절하게도 그 계단을 짚고 올라선다. 그 후에 새로운 의체를 가진 쿠사나기는 새로운 목소리를 선보이며 자신이 과거의 쿠사나기가 아님을 시사한다. 바트는 쿠사나기가 맞느냐는 질문을 던지지만, 쿠사나기(어쩌면 다른 존재일지도 모르는)는 이와 같이 대답한다. 

 

"바트. 언젠가 바다 위에서 들은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어? 그 말의 앞에는 이런 대목이 있어. 어린 아이일 때는 말하는 것도 어린 아이처럼... 생각하는 것도 어린 아이처럼... 논하는 것도 어린 아이처럼이지만 사람으로 되기에는 어린 아이인 것을 버리도다. 여기에는 인형사라고 불리는 프로그램도 소령이라고 불린 여자도 없어."


이제 새로운 종으로서 거듭나게 된 쿠사나기는, 이제 자신이 생명체로서 할 수 있는 권리, 즉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기 위해 네트로 둘러싸인 세상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어느 정도 필자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지만, 동일한 주제에 대해서 접근하는 방식은 정말로 다양하다. 타인의 글을 보면 니체의 초인적 삶과 허무주의로 접근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데카르트식 성찰의 발전 단계로 보는 사람도 있고,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는 사람도 있다. 모두 다 맞는 말 같기도 하지만, 일단 철학사조가 튀어나오면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이해조차 힘든 경우가 많다.


재미있게도 오시이 마모루는 바로 이러한 불친절함을 작품 곳곳에 숨겨놓았다. 작품의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몇몇 명언이나 문구가 인용되는데, 하나같이 처음 듣는 말들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설명조차 없다. 즉, 알아서 해석하라는 의미이다. 이 명언들을 하나씩 의미에 대해 심도있게 분석하려면 스스로가 이미 이 작품의 매니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광학미체까지 쓸 줄 아는 초강력 탱크. 이는 새 존재로의 도약을 위한 하나의 도전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불친절함은 아예 속편격인 <이노센스>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 작품은 그야말로 인용문의 줄줄이 비엔나 소시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아주 아주 심각하게 등장한다. 어쨌든 오시이 마모루 특유의 기법이니만큼 결코 하나의 표현 조차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여러가지 인용문 외에도 오시이 마모루가 숨겨놓은 또 하나의 장치는 바로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 어떤 캐릭터인지 잘 모르겠다면, 청소부가 자신의 딸래미의 사진이라고 들고 있던 그 사진 속에 있었던 진짜 피사체를 유심히 보라. 사실 그건 바셋 하운드 종의 강아지이다. 그런데 그 강아지가 중반부에 쿠사나기가 도시를 방황할 때 곤도라의 다리 위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다. 오시이 마모루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 강아지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인식하지 않으면 그냥 상황설정이겠거니 하겠지만, 사실 이 강아지는 오시이 마모루의 마음이 듬뿍 담긴 창작물이다. 이유는 단 하나, 오시이 마모루가 개를 좋아하기 때문. 여기에는 오시이 나름의 의미가 있겠지만, 추측하건데 온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객관적인 인류의 관찰자로 개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덧붙여 재미있는 사실은 실제로 오시이 마모루가 바셋 하운드를 키우고 있다는 점.


쿠사나기와 바트, 토그사라는 3명의 사로 다른 인물이 암시하는 바도 재미있다. 이들은 똑 같은 공안 9과 요원이지만, 삶의 방식은 다르다. 쿠사나기는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보다 나은 인류로서, 아니 궁극적으로 생명체로서 도약하기를 꿈꾸고, 반대로 바트는 이미 궁극의 의체화 단계에 이른 상태에서 더 이상의 도약을 거부하고 그대로 남으려 한다. 그런데 토그사는 아예 의체화도 진행하지 않고 순수하게 오리지널만을 고집하는 구시대적 인물이다. 


그렇다면 이 셋 중 가장 멍청한 사람은 누구일까? 흔히 생각하면 의체화를 하지 않은 토그사가 제일 멍청해 보인다. 다들 의체화를 하는데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쿠사나기는 특수화의 끝에 있는 것은 느슨한 죽음이라고 하였다. 이미 쿠사나기는 그 특수화의 끝에 있었기 때문에 도약을 위해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하지만 토그사는 아직 특수화의 끝에 와있지 않다. 그는 여전히 약한 존재로서 군림한다. 하지만, 그 약함이 내면의 강함을 불러일으킨다. 살고자 하는 욕망, 살아야겠다는 끈질김, 조금이라도 다치면 생명이 끝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서 오는 집착, 그런 것들이 때로는 생명력을 불러일으킨다.


<쿠사나기와 융합을 원하는 인형사의 눈빛은, 쿠사나기의 그 무엇과 무척 닮아있다>



<매트릭스>에서 이 것을 풍자하는 에이전트 스미스의 대사는 가히 압권이다. 매트릭스를 편한 세상으로 만들어 주었더니 모두 인간들이 죽어버렸다는 것. 즉, 인간은 편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생명력을 잃고 느슨한 죽음을 기다린다. 오히려 불안정한 상태여야 생명력을 얻고 존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토그사의 그러한 생명력 때문에 쿠사나기는 어쩌면 그를 부러워했을 지도 모른다. 토그사는 또한 자신이 지켜야 하는 아내와 자식이 있다. 가족이 있기 때문에 그는 완전한 사람의 삶을 살고 있다. 가족은 생명력의 또 다른 근원이 되기도 한다. 쿠사나기에는 없는 과거의 기억과, 가족, 그리고 평범한 삶. 그것은 바트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고, 오직 토그사만이 가지고 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쿠사나기는 토그사를 공안 9과로 특별히 모셔온 것이다. 하지만 이런 깊은 속뜻을 모르는 토그사는 자신이 쿠사나기를 대신해서 바트와 호흡을 맞추기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갈등을 품게 된다. 그러한 갈등은 아주 미약하게 드러나지만, 속편에서는 아주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만다.


밝혀지지는 않은 사실이지만, <천사의 알>과 <공각기동대>가 인류의 진보라는 차원에서 하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코드를 이해한다면, 극 중 캐릭터의 묘한 일치가 신선하게 느껴진다. 우연일지, 아니면 의도한 것일지 모르겠지만, <천사의 알>에서 마지막에 여인으로 숙성(?)하는 소녀의 모습이 <공각기동대>에서 인형사가 들어간 의체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다. 둘 다 보다 나은 존재로 전이한다는 부분에서 공통점이 있는데, 과연 이 것은 작가의 의도일까? 그런데, 또 자세히 보면 인형사의 의체와 쿠사나기의 얼굴에서 닮은 부분이 있다. 처음에 사고가 난 직후 실려온 의체의 얼굴에서는 안 보이다가, 갑자기 인형사의 목소리가 나오는 순간부터 그 얼글표정과 인상은 쿠사나기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 있다. 즉, 인형사가 쿠사나기에게 "우리는 서로 닮아있다"라는 말을 시각적으로 강조하려는 듯이 그 외모마저 닮게 그렸다고나 할까.



#7. 상업적으로도 작품성으로도 나름 성공한 희대의 애니메이션


에고… 너무 무거운 얘기들만을 꺼내왔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여기까지 읽지 않고 중간에 읽다가 지루해서 사이트를 닫았을지도. 어찌되었든 여기까지 읽어준 독자들에게 더 이상 무거운 얘기는 없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이제 다른 얘기로 넘어가보겠다. 흥행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이 작품은 1995년 일본에서 개봉 직후 정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애니메이션 치고 블록버스터로 인식될 만큼 엄청난 액수가 투입되었지만, 이를 상회하고도 남을 정도의 돈을 벌었다고 하니 말은 다했다. 그런데, 이 기세를 몰아 과감히 공략한 미국과 유럽에서는 오히려 기대 이하의 성과를 냈다. 애초에 이 작품은 일본 시장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 진출이라는 동시 목표를 가지고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그래서 일본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로 유럽의 공동투자자를 영입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왜 이런 푸대접을 받았을까? 추측컨데 아마도 시대를 초월하는 진보적 주제의식이 단순한 서구인들의 머리에 들어가기엔 너무도 과분이 아니었다 싶다. 일찍이 <블레이드 러너>가 보여준 행보처럼, 이 작품도 서구인들에게는 너무 낯설고 두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격당하기 직전 쿠사나기는 하늘로부터 천사를 보게 된다. 이는 새 존재로서의 도래를 뜻하는 하늘의 축복인가?>



국내에서는 당시 일본만화가 정식 수입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둠의 루트를 통해 암암리에 배포되었고, 이미 그 영향력은 파괴적일 정도로 뻗쳐있게 되었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 일본문화가 일부 개방되면서 이 작품도 드디어 정식으로 국내 극장에 걸리게 된다. 바야흐로 작품의 탄생 이후 6년만의 일이었다. 뭐 이미 볼 건 다 본 사람들이었으니 기대만큼 극장 흥행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으로서 이토록 충격적인 작품이 극장에 걸렸다는 것은 이 작품이 얼마나 가치가 있었던가를 알 수 있는 좋은 대목일 것이다. 



#8. 극장판과 다른 행보를 걷는 TV판 에피소드


여하튼 일본에서는 대 인기 폭발이었던 지라, 이후 TV판으로도 제작이 이루어져 2004년에 총 26부작의 TV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 S.A.C>가 탄생한다. 이 작품은 극장판 공각기동대와는 전혀 달리 철저하게 원작이 형식을 따라간다. 이야기도 전혀 다른 구도이기 때문에 TV판을 극장판의 뒷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예 별개의 스토리와 설정으로 이해하고 봐야 하는데, 그래서인지 TV판에는 인격적으로 고뇌하는 쿠사나기의 모습이라던가 어딘가 모르게 특수화의 끝에서 느슨한 죽음에 두려워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사건을 해결하는 당차고 기운센 천하무적 여걸 소령으로 보일 뿐이다. 


대신 바트나 토그사, 이시카와, 사이토, 보우마 등등 공안 9과의 많은 식구들이 자기만의 개성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재치넘치는 요소가 많다. 특히 극장판에서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다치코마’라는 인공지능 전투유닛들이 펼치는 아기자기한 재미가 그것. 오히려 이들이 각기 다양한 개성을 보여주며 때로는 극장판의 쿠사나기가 보여주었던 자아에 대한 고민을 대신 보여주기도 한다.


TV판은 각 에피소드마다 하나씩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해결해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과연 미래에 우리가 처하는 철학적, 윤리적, 도덕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사색을 보여준다. 하지만 역시 TV판답게 많이 무겁지는 않다. 대신 '스마일맨'이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극장판의 인형사와 유사한 컨셉을 심어주면서 시리즈 전반에 걸쳐 커다란 문제의 줄기를 형성한다. 하지만 역시 무게감에 있어서는 인형사에 비하면 보행기타고 다니는 어린아이 수준.


<공각기동대 TV판인 S.A.C. 쿠사나기의 꿀벅지가 도드라지는 도발적인 외모와 자태가 참으로 눈물겹다. 변강쇠가 된 듯한 바트의 저 모습은 더욱 안습...>


 

TV판에서 그나마 매력적이라고 느낀 요소는, 공안 9과와 그에 얽힌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멤버들이 위기에 처한다는 점이다. 결국 시리즈 막판에서 공안 9과는 내부의 정치적 음모로 인해 산산이 흩어지지만, 바로 이 부분이 원작만화에서 나름 비중있게 다룬 부분이다. TV판은 이후 <공각기동대 S.A.C 2nd GIG>를 내놓으며 그 이후의 이야기를 또 다시 26부작의 스토리로 담아내고 있다. 보다 강화된 주제의식과 액션, 그리고 정교화된 스토리는 또 다른 쿠사나기에 대한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도 있다. 그리고 이에 힘입어 또 다른 극장판 <공각기동대 S.A.C – Solid State Society>를 제작한다. 혹자는 이를 <이노넨스>의 후속편이 아닌가 라고 생각하지만,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TV판의 설정을 따라가고 있다. 따라서 애초부터 극장판으로 제작된 <공각기동대>와 <이노센스>는 원작에서 완전히 멀어져 오시이 마모루만의 작품이 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TV판이 얼마나 오시이 마모루스럽지 않은가는 음악 감독이 가와이 겐지가 아닌 칸노 요코라는 것만 봐도 그렇다. 게다가 캐릭터 일러스트까지 너무너무 다르다!! (쿠사나기 소령은 원작만화의 쭉쭉빵빵 매력녀의 모습을 TV판에서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어쨌든 <이노센스>에 대해서는 따로 리뷰를 통해 소개하도록 하겠다. 


아무튼 여러 뿌리를 내딛게 된 이 작품은 공교롭게도 2008년 100% 디지털 복원과 수정을 통해 블루레이 플랫폼으로 새롭게 출시되는데, 놀랍게도 첫 부분의 쿠사나기가 자유낙하하는 장면과, 바다에서 다이빙을 즐기는 장면이 100% CG처리가 되었다. 그래픽의 퀄리티야 아주 우수하지만, 문제는 되려 아날로그 냄세가 풀풀 풍기는 작품에 갑자기 디지털 CG가 서로 섞이지 않은 짬짜면과 같이 어우러져 있어서 어딘가 모르게 찝찝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역시 매니아들인 이 장면에 대해 질타를 퍼부었고, 이에 블루레이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퇴보한 작품으로 평가받게 된다. 참고로 이미 쿠사나기에 대한 CG 모델링은 TV판의 오프닝에서 시도되었지만, 아무래도 극장판에서는 CG화 자체가 전체적인 무게감을 떨어뜨린다는 느낌이 강했다.


<애니메이션 영상의 또 하나의 진일보를 기록했다는 이노센스. 저 실사같은 영상미를 보라>



#9. SF철학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명작


마지막으로 이 작품이 다른 영화에 끼친 영향을 언급하고자 한다. 쿠사나기가 자유낙하하는 장면, 너무도 유명한 이 장면은 후에 다른 영화에서 오마쥬되기까지 한다. 바로 뤽 베송 감독의 <제 5 원소>에서 밀라 요보비치가 건물 아래로 뛰어내리는 장면으로 나온 것. 뤽 베송 감독은 평소 오시이 마모루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해당 장면을 오마주했다고 하였고, 이에 오시이 마모루 역시 뤽 베송 감독을 존경한다고 하였다. 오시이 마모루에 대한 존경은 비단 그 뿐만이 아니다. <터미네이터>로 인류의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 제임스 카메룬 감독 역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을 극찬하였고, <매트릭스>로 인류의 두뇌를 뒤흔들어놓았던 워쇼스키 형제 역시 <공각기동대>의 매니아라고 인정하며 수 많은 요소를 <매트릭스>에 그대로 따왔다고 하였다. 


이제 대부분의 SF철학자들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류 최초의 고민을 보았고, <공각기동대>를 통해 문제의 해결에 대한 진보적이고도 심화된 프로세스를 보았으며, <매트릭스>를 통해 문제의식을 어떻게 대중에게 호소해야 하는가를 보았다. 이 계보를 이어 과연 다음 번에는 어떠한 작품이 탄생하여 또 한번 우리의 대뇌를 후려칠까?


이미 3개의 작품으로 자아정체성과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고뇌를 항상 대뇌에서 떨쳐버릴 수 없게 된 필자이다. 끝없이 고민하고 사색하고 연구하고 알고자 노력하여도 알 수 없는 영역, 바로 그 영역에 필자가 떨구어져 버린 계기가 바로 위의 세 작품인 것이다. 이미 빠져버렸으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겠다. 이제는 이러한 사색이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누군가 필자에게 왜 그런 쓸데없는 고민을 하느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충고하겠지만, 맞는 말이다. 이러한 사색은 밥도 안 먹여주고 돈도 안 벌어다 준다. 하지만 필자는 재미있다. 어쩌면 두려움, 불안, 어두움의 단계를 벗어나 어쩌면 희망이라는 꿈을 가지고 보다 나은 존재로서의 전이를 위해 꿈꾸는 쿠사나기의 환영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오픈 유어 아이즈'의 엔딩과 '제 5 원소'의 자유낙하 장면과 유사한 명 장면>



니체는 말하였다. "너 자신을 스스로 불길로 태우고자 해야 한다. 먼저 재가 되지 못할 때 네가 어떻게 새로워지길 바라겠는가?"라고. 나 자신을 버리고 초인으로서 각성해야 비로소 참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제 여러분도 준비되었는가? 새로운 나로서 거듭나기 위해 두려움과 불안과 어두움을 받아들일 준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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