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필자가 2010년 2월에 구 블로그에서 작성한 글을 옮긴 것입니다.
8인: 최후의 결사단 (十月圍城: Bodyguards And Assassins)
필자가 얼마 전 <엽문>이라는 중국 근현대사의 맥을 짚는 휴먼 다큐멘터리식 영화를 접하면서, 중국이 과거의 왕구라 황당무계 무협액션 영화에서 벗어나 보다 철학적이고 주제의식이 강한 액션 영화들을 만들어내려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그리고 이번에 접한 영화 <8인: 최후의 결사단>도 처음에는 단순 액션영화인 줄 알았으나 오히려 엽문보다 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강하게 녹아들어있는 무거운 작품이라는 소문을 듣고 순간 움찔했더랬다. 영화 제목과는 전혀 매칭되지 않는 스토리와 주제의식으로 진행되는 일명 섞어찌개식 난잡 영화, <8인: 최후의 결사단>에 대해서 리뷰해 보겠다.
<결사단은 커녕 거리의 거지들로밖에 보이지 않는 주인공들의 슬픈 이야기>
#1. 스토리 - 어지러웠던 중국 근대의 정세만큼 어지러운 주인공들의 막장 드라마식 결사의 향연
왜 필자가 섞어찌개식 난잡 영화라고 했는지는 나중에 알아보고, 일단 스토리부터 짚고 넘어가자. 때는 1900년 초 청나라 말기, 외세의 침입이 득실거릴 때이다. 일찍이 한족의 나라에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인 만큼 한족의 지식인들은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여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의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창하고 있었다. 그러한 지식인 중의 한 명인 양구운(장학우)은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에게 중국의 근대화를 부르짖다가 어디선가 날아온 총탄에 의해 두뇌에 살포시 터널이 뚫리면서 그 자리에서 비명횡사한다. 이렇듯 당시의 중국은 근대화를 추구하는 혁명파와, 이를 저지하려는 청나라 조정의 암살자들간의 치열한 피비린내나는 싸움이 시도때도 없이 벌어지는 시기였다.
1906년 10월. 당시 영국령이었던 홍콩은 이러한 피바람의 전운에서 살짝 벗어나 있었다. 아무래도 청나라의 힘이 잘 미치지 못했었던 것. 그러다보니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인 손문은 홍콩에서 중국의 내노라하는 지식인들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13성의 대결의’라는 것을 추진하고자 한다. 이에 이를 절대적으로 저지하려는 청나라 조정에서는 암살자 염효국(호군)과 일당을 홍콩으로 보내 손문을 척살할 것을 명한다. 손문의 홍콩 방문을 위해 미리 홍콩에 들어온 손문 서포터즈 넘버 원 진소백(양가휘)은, 손문 홍콩 무사 입성을 위해 서포터즈를 모집하기에 이른다. 그간 청나라 군대에서 배척당하여 연극단원으로 위장 후 입에 풀칠을 하고 있었던 방장군(임달화)를 만나 서포터즈에 가입시키고, 또한 절친이자 돈줄인 이옥당(왕학기)을 만나 또 다시 3천만 땡겨달라고 조른다. 그러면서 이옥당의 절세미남 아들인 이중광(왕백걸)을 꼬셔 서양학을 배우게 하고 은근 자신의 사상을 세뇌시키기에 이른다.
<결국 사건의 원흉은 혁명이랍시고 설레발치는 진소백이다. 세월 앞에 무릎 꿇은 양가휘 형님>
한편 홍콩에 도착한 염효국은 돈벌이라면 온갖 심부름을 다 하는 무늬만 경찰 심중양(견자단)을 시켜 진소백의 일거수 일투족을 조사하게 한다. 그러던 중 이중광이 서양 대학에 붙었다고 집안 잔치를 벌리는 이옥당의 집에 잠입한 심중양은 창문을 통해 달아나던 중 이옥당의 수많은 마누라 중 한 명인 월여(판빙빙)을 만나 과거에 묘한 인연이 있음을 암시하면서 자취를 감춘다.
손문이 홍콩에 도착하기로 한 날이 이제 3일 정도 남았을 시점에서, 거리에서는 손문이 홍콩에 온다는 소식을 대거 보도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동조하여 시민 혁명주의자들은 거리에서 전단을 뿌리며 중국 근대화를 부르짖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자신의 전용 운전사인 아사(사정봉)가 모는 인력거를 타고 홍콩 거리를 싸돌아다니던 이옥당은 시민 혁명주의자 가운데 자신의 아들인 이중광이 있음을 알고 깜놀한다. 아들을 말리는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에 저항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아들. 하지만 묘하게도 거리의 시민들은 이중광의 호소에 동조하며 근대화에 적극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화가 난 이옥당은 진소백에게 달려가 왜 자신의 아들을 끌어들였는지를 따진다. 하지만 진소백은 이옥당도 이미 혁명당의 일원에 가담되어 있다며 중국의 혁명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오로지 아들 출세하기만을 바라보며 살아 오던 이옥당에게는 피가 거꾸로 솟는 일.
친구를 잃은 진소백은 무언가 짧은 편지를 남긴 후 거사를 치르기 위해 방장군의 극단으로 향한다. 하지만 심중양은 암살자 염효국의 심부름으로 미리 극단에 경찰이 없도록 조치하고, 암살자들은 느긋하게 극단에 쳐들어간다. 진소백은 줄행랑을 치고, 방장군과 그의 딸 방홍(이우춘)은 필사적으로 진소백을 보호하려 하지만, 딸이 더 아까웠던 방장군은 딸을 기절시켜 목숨을 건지게 하고 자신은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방홍이 극단으로 달려오지만, 이미 아버지를 비롯해 모든 단원들이 시체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 뜬금없이 이옥당도 극단으로 달려와 단원 모두가 개죽음 당한 것을 깨닫고, 그 와중에 절친인 진소백의 시그네쳐 에디티드 펜슬이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가 죽거나 혹은 납치당했음을 알게 된다.
평소 진소백이 운영하던 중국일보 신문사에 온 이옥당은 진소백의 진심이 담긴 편지를 발견하고, 그가 마지막으로 이옥당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혁명의 불씨를 일으켜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을 읽게 된다. 순간 사미부(증지위)가 경찰서장으로 있는 홍콩 경찰이 들이닥쳐 신문사를 폐쇄하고 모두 해산 명령을 내린다. 이에 열받은 이옥당은 갑자기 언제 그랬냐는 듯이 혁명의 불씨를 활활 타오르게 할 것이라면서 일종의 선전포고를 내린다. 이에 감동받고 열혈지지하는 신문사 직원들.
<혁명가와 암살자가 스승과 제자라는 막장스러운 연결고리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섞어찌개식 영화>
손문이 홍콩으로 오기로 한 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오고, 이옥당은 드디어 손문 완벽 보호 작전을 위해 보디가드들을 모집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목숨 내놓고 보수 한 푼 없이 해야 하는 보디가드 역에 이옥당과 지인들이 합작하여 여러 듬직한 사람들을 끌어모으니, 이 중에는 복수심에 가득 찬 방장군의 딸 방홍도 껴 있었다. 얼마 전 이옥당의 집안 잔치때 쌀 가마니를 얻어간 쵸두부 매점 주인인 거구의 사나이 왕복명(바특)도 합세하고, 그저 거리에서 동냥이냐 하면서 이옥당이 주는 돈으로 매번 아편만 펴대던 걸식도사 유욱백(여명)도 이옥당이 선물로 준 철부채에 감동하여 보디가드에 합류하게 된다. 그리고 매번 운전사 노릇만 하던 아사도 껴달라고 조르고, 이에 이옥당은 보답으로 아사가 사모하던 사진관 알바생 아손(조원)과 혼사를 맺어준다.
한편 납치구금당한 진소백은 손문을 암살하려는 염효국이 자신의 과거 제자임을 알고, 그와 사상대결을 펼친다. 하지만 오로지 황권은 하늘로부터 부여된다는 막무가내식 철학으로 만민이 평등하다는 진소백의 철학을 개무시하는 염효국. 결국 사제간의 정을 끊고, 염효국은 대원들을 데리고 항구로 떠난다.
손문 도착 하루 전. 이옥당은 여러 사람들에게 작전 지시를 내린다. 그야말로 한 순간의 실수와 여유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한 VIP 보호 작전. 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대체 자신이 누구를 지켜야 하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 이 작전을 위해 월여는 심중양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데, 알고봤더니 심중양과 월여는 과거 연인사이였던 것. 하지만 심중양이 바다이야기(라 쓰고 도박이라 읽는다)에 빠지면서 집안을 말아먹고, 이에 월여는 그의 아이를 잉태한 채 이옥당에게 시집갔던 것이다. 결국 월여는 히든카드로 심중양과 자신이 낳은 딸래미를 꺼내고, 이에 제대로 쇼크먹은 심중양은 딸래미 크리에 어쩔 수 없이 부탁을 들어줄 것을 결심한다.
<뛰어야 산다는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인력거 부대>
경계가 허술해진 틈을 타 진소백은 자신의 배를 가르는 퍼포먼스를 손보이며 탈출에 성공하고, 유욱백과 술이나 쳐먹으면서 개똥철학이나 나누고 온 이옥당에게 달려와 겨우 목숨을 구한다. 그리고 마침내 진소백은 모든 사람들에게 손문을 보호하기 위한 필사의 전략을 공개한다. 바로 누군가 한 명이 손문을 대신해 단 1시간동안만 홍콩 시내를 싸돌아 다니면서 암살자들의 눈길을 돌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무작위 투표에서 손문 대리인으로 이중광이 뽑힌다.
드디어 손문이 홍콩에 도착하는 날이 밝아오고, 진소백을 비롯한 보디가드들은 항구 주변에서 잠복 근무를 실시한다. 하지만 이미 암살자들은 거리 곳곳에 부비트랩을 설치해놓은 상태.
<도박쟁이가 알고 봤더니올라운드 무술 고수였다는 또 한번의 초특급 왕구라 설정을 보여주는 심중양>
#2. 주인공들이 개죽음을 불사하고 살리려고 한 극중 실존 인물 손문에 대한 고찰
스토리를 살펴보았는데, 뭐 결론적으로 줄창 아작나는 스토리이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일단 다 죽이는 게 목적인 듯 보이는 영화이다. 그런데 이토록 필사적인 이슈를 만들어내는 인물인 손문은 대체 누구이길래 지는 손가락 하나 까닥 안하면서 무고한 시민들을 천국으로 보낸단 말인가?
손문, 짱개 발음으로는 쑨원. 손중산이라고도 불리우는 사나이. 중고등학교 정규 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세계사 교과서에서 봤음직한 이름이다. 아니, 어쩌면 이 이름을 모르더라도 윤리도덕 시간에 ‘삼민주의’라는 것은 들어봤을 수도 있겠다. 중국의 근대화의 이념이 된 삼민주의를 주창한 사나이가 바로 손문이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손문은, 실제로 1905년에 동맹회라는 것을 창설해서 중국의 혁명을 위한 서포터즈를 구축하고 그 유명한 삼민주의를 주창한다. 그리고 6년 후인 1911년 신해혁명을 일으켜 청나라를 쫑내고, 이듬해 중화민국을 수립한다.
영화에서 그토록 대단한 무언가로 비추어졌던 혁명이 실제로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손문의 혁명은 씁쓸한 과정을 겪게 되는데, 중화민국 수립 후 임시 대총통이 된 손문은 일본의 괴뢰정부라 할 수 있는 만주국의 황제이자 중국 역사상 최후의 황제로 남은 부의(푸이)를 폐하면서 중국 고대사의 모든 잔존을 씻어내리지만, 곧바로 대총통이 된 위안스카이에 의해 혁명의 본질이 와해되면서 그와 대립하게 된다. 이후 동맹회를 국민당으로 개편한 손문은 위안스카이 타도를 위해 2차 혁명을 시도하지만, 이는 실패하게 되고 결국 그는 일본으로 도피한다. 이후 군벌과 협력 및 파기를 반복하면서 계속 혁명을 위한 투쟁을 시도하지만 외세, 특히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이를 물리치기 위해 중국 공산당과 국공합작을 하게 된다. 비록 이념은 달랐지만 일단은 외부의 적을 무찔러야 한다는 공통된 목적으로 뭉친 두 단체는, 치열한 투쟁 끝에 마침내 2차 대전의 일본의 패망과 함께 승리를 이끌어내고 말았지만,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 갈등이라는 측면에서 또 하나의 내분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이후 손문의 후계자인 장개석(장제스)에 의해 더욱 발전한 국민당은, 모택동(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에 대항하고자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고, 스탈린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공산당이 마침내 승리함으로써 국민당은 축출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중국은 혁명의 본질인 민주주의에서 벗어나 공산주의 사회로 거듭나게 되었고, 여전히 그 사상을 이어받은 국민당은 대만으로 도망쳐 지금도 민주주의 국가로서 존속하고 있다. 물론 중국과 대만은 여전히 사이가 아주아주 안 좋다.
<마이클 조던의 에어워크에 감명받아 하늘을 날고자 했던 한 암살자의 아름다운(?) 시도>
#3. 이 영화는 구라를 가장한 다큐인가? 다큐를 가장한 구라인가?
이토록 중국 근대 역사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손문은, 대만에서는 국부로서, 그리고 중국에서는 근대혁명을 선동한 혁명선행자로서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쯤 되면 많은 사람들이 품게 되는 의문이 있다. 손문이 이토록 언빌리버블한 위대한 실존 인물이라면,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이야기 또한 사실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를 아주아주 강력하게 뒷받침해주는 것처럼 등장하는 설정이 바로 줄창 죽어나가는 결사대원들의 생년월일과 이름, 그리고 출신이 소개된다는 것. 그런데 정작 죽지 않아서 자막으로 소개되지 않는 핵심 인물 2명이 있는데, 그 둘은 바로 이옥당과 진소백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옥당과 진소백은 실존 인물이다. 이옥당이 실제로 영화에서처럼 시작과 끝이 매우 모순된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소백이 지휘하는 동맹회에 자금을 대준 것은 사실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소백도 영화처럼 가치관적 모순을 드러내는 인물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혁명 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다. 친절하게도 설명이 주구장창 붙었던, 짧고 굴게 살다 갔던 나머지 결사대원들은 실존 인물이까 하는 의문. 나름 그럴싸하게 자막처리로서 관객들을 혼란에 빠트리는데, 사실 필자는 이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찾지를 못했다. 일부는 실존 인물이었다고도 하고 일부는 아니라고도 하는데, 아직 정확한 것은 모르겠다. 만약 실존 인물들이었다고 해도, 유욱백의 1:100 대결은 그야말로 오리지널 짱개식 초특급 구라 액션이었기에 도무지 신빙성이 느껴지지 않으며, 닌자 어쌔신을 능가하는 심중양의 전천후 대활약도 정말 대륙급 구라처럼 느껴진다.
자, 그럼 여기서 영화의 제목을 슬쩍 건드려보겠다. 국내 개봉 제목은 <8인 : 최후의 결사단>이다. 왜 8인이지? 일단 자막처리로 나름 비장미 선사한 전사자들의 수를 세어보자. 방홍, 유욱백, 왕복명, 아사, 이중광, 심중양. 일단 6명이다. 여기에 이옥당과 진소백을 포함하면 8명이 된다. 아마도 이렇게 해서 8명을 주인공을 치고 제목을 지었나 보다. 하지만 원제는 十月圍城으로, 해석하면 10월에 성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중국애들 작명 쎈쓰는 우리와 차원이 다른가보다. 그나마 가장 스토리에 부합되는 제목은 영어제목이다. 경호원들과 암사자들이라. 단순하지만 그나마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북한군을 연상케 하는 복장과 외모로, 자랑거리인 노래는 커녕 나왔다가 초상만 나고 마는 방홍>
원래부터 짱개영화 제목은 한자 다르고, 영어 다르고, 한글 다르기가 부주기수였다. 이번 작품도 어중간한 원제이다 보니 국내 배급사에서 또 한번의 작명 쎈쓰를 작렬해주신 셈. 뭐 그다지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4. 혁명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려한 정치적 작품
작품 내적으로 들어가보면, 줄창 죽어나간 인물들이 왜 손문을 보호하기 위해 그토록 처절하게 죽어야만 했는가에 대해서 참으로 껄쩍지근하다. 손문이 위대하고도 중요한 인물인건 알겠지만, 그건 후세에 와서 그렇게 평가를 받는 것이고, 당시에는 과연 많은 사람들이 손문에 대해 그토록 잘 알고 있었을까? 여기에서 우스운 사실은, 목숨걸고 지키는 결사대들 조차 손문이 누구인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를 끝내 모른 채 세상 하직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대의명분이 각각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떨어진다는 뜻. 예를 들어, 방홍의 경우에는 단순히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가담하게 되고, 결국 복수하다가 자기도 인생 하직한다. 심중양은 어떤가? 그는 애초부터 손문은 안중에도 없었고, 단지 월여의 딸래미 크리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이옥당을 지키려고 나선 것이다. 쵸두부만 먹고 자라서 키가 홍만이형스럽다는 왕복명 역시 쌀 몇 자루 얻어먹었다고 나선다. 유공자로 나오는 유욱백은 거의 막장 수준이다. 자기가 사랑한 사람이 누나인데 사랑을 할 수 없다하여 눈물로 질질 짜며 허송세월 보내다가 맨날 받아먹던 동전과 가보라는 철부채 공세로 인생뭐있어 하고 목숨 내놓은 유욱백의 모습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설정.
손문은 마지막에 눈물을 글썽이며 이들의 죽음이 곧 혁명을 위한 필연적인 희생일 수 밖에 없음을 호소하려는 듯한 퍼포먼스를 펼치지만, 여기에는 혁명을 지나치게 과격하게 묘사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혁명이란 인류의 오랜 역사를 통틀어 줄기차게 일어난 사건으로, 나름 이데올로기나 시대의 전환점을 마련하는 커다란 사건이 혁명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중국의 근대사에서도 손문의 신해혁명은 확실히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맞고, 이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잘 이해하고 있었던 손문을 비롯한 혁명가들은 혁명이라는 단어를 내세움으로써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혁명이 반드시 희생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단지 피를 부르는 수많은 참가자들의 희생과 고통이 수반된 어떠한 일련의 도전적 행위가 성공하여 변화를 가져왔을 때 혁명이라고 평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을 뿐이다. 손문의 신해혁명도 성공했기에 혁명으로 평가받아 왔겠지만, 만약 실패했었더라면 어떤 평가가 내려졌을까? 아마도 그냥 손문의 반란 정도로 치부되었을런지도 모른다.
어쨌든 손문이 추구하고자 했던 혁명은 과연 무고한 민중의 희생을 수반할 수 밖에 없는 혁명이었을까 한다면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필자가 손문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중국 근현대사에 대해 아는 바도 많지 않기 때문에 100% 정확한 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민주주의의 개념을 누구보다도 선구적으로 바라보았던 손문이 과연 그러한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민중을 줄창 죽여나가면서 혁명을 이루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이 작품을 위해 맨발의 기봉이를 10번 이상 답습했다는 사정봉. 믿거나 말거나>
반대로, 영화에서 이러한 희생을 강조하는 것은 아마도 현대의 중국이 처한 상황에서 비롯된 일련의 정치적 의도가 아닌가 생각된다. 중국은 현재 공산주의 사회이고, 공산주의는 사상의 핵심에 바로 혁명이 존재한다. 계급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투쟁을 통해 혁명을 쟁취함으로써 비로소 완벽한 공산주의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고, 이 혁명에는 바로 무력이 필연적으로 존재함을 강조한다. 알겠지만 모택동의 공산주의도 엄청난 유혈사태 끝에 달성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으로 어두울 수 밖에 없는 부분을 조금이나마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혁명을 위한 희생은 숭고한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재미있게도 영화가 제작된 2009년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지 60년이 되는 해였다고 한다. 중국정부에서는 의도적으로 이러한 중화인민사상을 합리화하고 더욱 굳건히 하자는 의도를 듬뿍 담은 수많은 문화예술 지원이 있었고, 그러한 차원에서 이 작품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 뻔하다. 예부터 소련이든 북한이든 중국이든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알게모르게 영화, 노래, 연극 등에 정치적 의미를 짙게 드리우면서 민중들을 세뇌시키는 짓거리를 많이 해왔던 바, 여전히 중국은 그러한 차원에서 이러한 시도를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진정한 혁명을 이해하는 자라면 이 작품 역시 비판의 시각으로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5. 임성한 작가도 울고갈 막장 주말 드라마가 되어버린 비운의 작품
뭐, 이제 살짝 영화의 진정한 의도가 드러난 이상, 그러한 의도를 보다 더 의미심장하게 표출해야 하는 연출 면에서는 어떤가를 살펴보자. 솔직히 필자는 기대보다 실망이 컸다. 일단 초장에는 손문의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건드렸다는 점, 그리고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툭툭 터져나오는 호화찬란한 배우들. 이 정도면 정말 중국의 역사 블록버스터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런데, 정작 배우들이 너무 화려한 것에 비해 역할이 짤막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역할들의 개성도 다양할 듯 하다가 너무 개연성이 떨어져버렸다는 점. 그리고 그토록 빈약한 개연성을 극복하고자 꺼낸 도구가 변기 막힌 듯 철철 흘러넘치는 눈물이라는 점.
아마 대부분의 관객들이 얼마 전 개봉한 수작 <엽문>으로 인해 견자단의 리얼 액션을 기대하고 본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견자단은 주인공이라 하기도 어렵고 그저 빛나는 조연 중의 한 명이라는 것 정도. 한때 4대천왕으로 홍콩을 뒤흔들었던 장학우도 엔딩크레딧을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는 안면으로 잠깐 등장해서 씁쓸함을 안겨주고, 한때 미모로 또한 홍콩을 좌지우지했던 이가흔도 눈 깜빡 하면 나왔다 들어가버리는 아쉬운 캐스팅에 눈물샘을 자극한다. 여명도 처음에 거지로 나올 때는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안습이다. 게다가 뒤이어 면도하고 나왔어도 어딘지 모르게 불쌍해 보이는 그 모습이란. 극중 최강의 무술 실력을 가진 인물로 나옴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선한 이미지 탓에 거지하고도 안 어울리고, 무술 고수하고도 안 어울리는 최악의 캐스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슈퍼스타 K와 비슷한 중국의 후난위성 TV 슈퍼걸 노래자랑대회에서 엄청난 노래 실력으로 단숨에도 스타자리에 오른 날벼락 스타 이우춘도 방홍 역을 맡으면서 실로 얼굴 망가지심이 대단하다. 이 역시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니 참으로 안타까운 역할. 사정봉도 그저 달리기밖에 못하는 맨발의 기봉이급 인력거꾼으로 등장하여 안습을 자아내고, 판빙빙도 나름 싸가지없는 여편네로 등장하여 여전히 2007년 토할 것 같은 연예인 상위랭커로서의 입지를 보여주고 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토할 것 같은 연예인에 상위 랭크되었는지 미스테리인 판빙빙>
필자가 생각하기에 가장 안타까운 배우는 바로 양가휘. 진소백이라는 나름 비중있는 인물을 맡은 그이지만, 예전의 양가휘다운 포스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양가휘인지도 몰랐다. 원래 조금 샤프해 보이던 얼굴이었는데, 이제 나이들고 머리도 유치원 갓 입학한 애들처럼 깎아놓아서 더욱 안습으로 보인다. 한때 동성서취, 동사서독, 도협, 도신 등으로 90년대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으로 존재하던 양가휘가 어쩌다 이렇게 망가졌는지. 솔직히 역할 자체로만 보면 진소백이란 인물은 매우 매력적이고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극중 내내 진소백은 말로는 혁명과 민주주의 어쩌고 떠들면서 뒤로는 실천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이를 가장 잘 드러내는 장면이 바로 이중광이 짝퉁 손문으로 당첨될 때 진소백이 너만은 안 된다며 말리는 모습. 그 전에도 이미 진소백이 이옥당에게 넌 이미 돈 냈으니까 우리팀이라면서 어디서 혼자 내빼려고 하냐고 하기도 한다. 나름 용의주도하면서 기회주의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양가휘가 예전부터 살짝 그런 이미지의 배역을 해오더니 여기서도 크게 벗어날 수 없었던 듯.
나름 포스 풍겨주신 캐릭터는 의외로 암살자 염효국 역으로 나온 호군. <적벽대전>에서 상산의 조자룡 역으로 나와서는 너무도 선한 이미지 보여주신 덕에 도무지 암살자로서 어울리지 않는 페이스. 그래서 그런지 눈썹을 왕창 밀어버리고 미친 놈처럼 등장해주시는 쎈쓰. 게다가 이것도 모자라 입가에 흉터까지 그어주셨다. 그런데 이 친구 은근 호빵맨 닮지 않았나? 어쨌든 암살자 치고는 너무 페이스가 안 어울린다고 생각된다. 차라리 별 대사도 없고 그 자체로 암살자 같은 바특이 암살자역을 했다면 좀 더 엘레강스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음으로 거론하고 싶은 것이 바로 화산 폭발하듯 여기 저기 뿜어져 나오는 눈물. 뭐 좀 했다 하면 일단 모든 출연진들이 울고 시작한다. 혁명이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눈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될 정도이다. 홍콩이 눈물로 홍수가 안 난 것이 천만다행인 듯. 그토록 이 작품에서는 비장미를 선사하고 작품을 더욱 주제의식 짙도록 만들기 위해 눈물잔치를 남발하였다. 하지만 이는 지나친 것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옛말을 답습하는 연출인 듯. 적당히 울면 되는데 너무 질질 짜다보니까 보는 사람이 짜증이 날 정도이다. 가족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심정은 잘 알겠는데, 왜 시도때도 없이 울어버리는 것인지. 인력거 끌면서 도망치는 와중에도 서로 쳐울고 있으면 어쩌란 말인가. 안구가 건조하고 총총해야 빠른 시간에 완벽한 핸들링으로 인력거를 몰 텐데, 안구에 습기 가득하니 이는 마치 집중호우 한가운데에서 자동차로 야간 운전하는 꼴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도무지 거지와 무술고수라는 컨셉 그 어느 것과도 어울리지 않는 여명. 왜 나왔니??>
#6. 제작 퀄리티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는 짱개 필름
너무 비판만 한 것 같은데, 그래도 이 작품이 보여준 막판 추격씬에서의 긴장감과 스릴감, 그리고 장렬한 액션은 수준급이라고 칭하고 싶다. 울어재끼는 것만 빼고는 빠른 전개에 의한 긴장감이 나름 백미이고, 짧지만 간간히 터져주는 액션은 최근 홍콩영화가 보여주는 군더더기 없는 리얼 액션을 선보여주고 있다. 특히 견자단과 청레라는 태국 출신 격투가와의 대결은 엽문에서의 마지막 대결과 비슷하게 전개되어 매력적이다. 암살자로 분한 청레의 움직임을 보면 확실히 무에타이같다는 느낌이 강하다. 견자단의 정통 쿵푸와는 다른 느낌. 하지만 무에타이는 입식 타격이다 보니 아무래도 그라운딩 기술이 조금이나마 더 발달된 쿵푸에 의해 밀리고 마는 현실. 아마 상대가 무에타이가 아닌 주짓수나 레슬링이었다면 게임 자체가 너무 지루했을 듯.
20세기 초의 홍콩의 모습도 볼거리가 제법 된다. 동시대를 배경으로 한 다른 영화들이 홍콩을 무슨 시장통처럼 꾸며놓았던 반면, 이 작품에서는 보다 서구화되고 잘 정돈된 홍콩을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뭐 실제로 어땠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영국에 의해 실질적으로 지배가 되었던 홍콩이었던 만큼 서구적인 느낌이 더 강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이 작품을 제작한 감독 진덕삼은 사실 <삼부관>이라는 듣보잡 영화 단 한편만을 제작한 초짜 영화감독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진덕삼을 가장 유망한 감독으로 칭하고 팍팍 밀어주고 있다고 한다. 이번 작품도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B급스러운 느낌도 없기 때문에 앞으로 그의 차기작들을 기대해 본다. 수없이 등장하는 초호화 캐스팅들은 자세히 보면 홍콩과 중국, 대만의 신성들이 대거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그 동안 서로 별다른 합작을 만들어내지 못했던 3개의 영화계가 모처럼 공통분자인 손문을 배경으로 근사한 합작을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20세기 초 영국이 지배하던 홍콩의 실상을 아주 잘 드러낸 장면. 거의 명동 수준이다>
건국 이래 현재까지 으르렁대고 있는 대만과 중국. 최근에도 여러 차례 군사적, 정치적 갈등이 있었고, 앞으로도 절대 타협의 의지가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두 나라. 혹자는 세계 3차 대전은 아시아, 그것도 대만과 중국의 갈등으로 인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을 정도로 한국과 일본 못지 않게 사이 더럽게 안 좋은 두 나라가 이번 영화를 계기로 사상적으로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7. 영화 내용의 진위여부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 손문이 영화에서처럼 1906년 10월에 홍콩에 갔는가에 대해서는, 실제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손문은 중국 내에서의 국가적인 반란 실패와 여러 위협 때문에 일본으로 도피한 상태였기 때문에 홍콩 근처에도 올 수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영화는 전체적으로 구라가 된 셈이다. 그렇다면 결사대 중 자막처리까지 하면서 세상 하직한 사람들의 실존 여부도 답이 나오려나? 그것은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실존 인물들을 모티브로 따왔다고 했으니, 인물들은 사실이되 활약상은 거짓이 될 수도 있겠다.
나름 소림사 출신에 엄청난 거구로서 장풍까지 구사하는 것으로 등장했던 NBA 농구선수 바특이, 소림사 무술은 내팽겨치고 야자나무로 덩크슛만 하다가 끝나는 씁쓸한 영화, <8인 : 최후의 결사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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